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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성(性)과 과거의 유전자

남녀 성 전략의 근원

by 공상과학철학자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양성평등, 남녀차이


몸에 지방이 많은 여자는 남자에 비해 추위를 잘 견딘다.

그렇다면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날씨에, 부인은 집에서 쉬고 남편이 샴푸를 사러 밖에 나가는 것은 공평하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남편이 소파에서 유튜브 보는 사이, 팔 힘이 약한 부인이 무거운 테이블을 재활용장으로 옮기는 것은 공평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렇듯, 남녀는 분명한 신체적 차이와 특성이 존재한다.

어느 한쪽의 우월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6500만 년 전 제5차 대멸종 당시, 덩치 크고 힘센 대부분의 공룡들은 모두 멸종했는데, 몸이 작고 가벼워 많은 먹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조류 수각류만큼은 예외로 살아남았다.

우월성의 기준을 종의 생존에 둔다면, 여성처럼 작고 가벼운 조류 수각류들이 승자일 것이다.

이처럼 어느 것은 여자가 낫고, 어느 것은 남자가 나은 말 그대로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성(性) 전략에서 큰 대비를 보인다.


남자는 하루 약 1억 개 정도의 정자를 생산하며, 평생 동안 생산하는 정자의 수는 1조 개에 이른다. 여자가 30~40년 가임기간 동안 생산하는 난자 수 400개 정도에 비해 턱없이 많은 수치다.

이는 생물계에서 수컷은 양적 번식 전략을 쓰고, 암컷은 질적 번식 전략, 즉 우수한 수컷을 선별하려는 전략과 일치한다.

암컷은 새끼를 뱃속에 품고 양육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므로, 가능한 한 우수한 유전자를 신중히 선별해 선택하려는 반면, 수컷은 일단 많이 씨를 퍼뜨리는 것이 유전자의 후대 전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역시 남자는 기본적으로 양적 번식 전략(많은 여자)을 취하고, 여자는 질적 번식 전략(우수한 남자)을 취한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남자의 양적 번식 전략과 여자의 질적 번식 전략이 완전하게 작동하지는 않게 되었기도 하다.

그리고 현대 피임 기구의 등장 및 생애 패턴 변화와 함께 남녀의 결혼과 성은 변화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

우선, 옛날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이족보행의 득과 실


숲에서 쫓겨나 초원으로 밀려난 고대 인류는, 먹을 것을 찾아서 많이 이동해야 했다.

발로 걷는 것은 순간적으로 빨리 달리기에 유리하지만 그만큼 에너지 손실이 크다. 하지만 두 발로 걷게 되면 장거리를 이동하는 데 있어 유리하다. 에너지 손실이 훨씬 적다.


마침내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개체가 일부 태어나게 되었고, 초원에서 유리한 이족보행 형질은 대를 이어 점차 그 수를 늘려나갔다.

두 발로 걷고 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면서 뇌가 발달했다.

이족보행은 낮은 에너지 손실과 뇌의 발달이라는 이점을 주었지만, 치명적인 문제도 하나 가져다주었다.

바로 네 발 보행에 비해 골반이 좁아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엄마 배 속에서 성숙하게 자라 머리가 크게 태어나려는 아기는 출산 중 엄마와 함께 죽고, 9개월 정도만 미성숙하게 자라 머리가 작게 태어나려는 아기만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현대 아기의 뇌는 성인 뇌의 약 25% 정도로 작은 크기로 태어난다.

성체 뇌의 40~50% 크기를 가진 채 태어나는 침팬지, 고릴라의 태아에 비해 우리의 아기는 아주 미숙하다.



긴 육아 기간과 인간의 성전략


그래서 인간의 아기는 무척 긴 육아 기간을 필요로 한다.

송아지는 태어난 지 1시간이면 걷고, 강아지는 2주면 걷는데 비해, 사람은 1년이 지나야 겨우 조금씩 걷기 시작한다.


사람의 이러한 긴 육아 기간은 남성의 양적 번식 전략에 근본적인 도전을 던졌다.


긴 육아 기간을 필요로 했던 여자는 남자의 직간접적 육아 참여를 획득하려 했다.

다른 영장류들의 암컷은 발정기에 신체적 변화를 보이며 특정 기간만 수컷의 교미를 유도하는데 비해, 인간 여성은 어느 세대에 이르러서는 배란기에도 특별한 신체적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숨겨진 배란기'인데, 이것은 남성을 상시 여성 곁에 머물게 했다.

여성의 배란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남성은 여성 곁에 항상 머물며 수시로 짝짓기를 시도하고, 여성을 위하면서 사냥한 고기도 가져다 바쳤다.

물론, 여성의 입장에서 숨겨진 배란기는 여러 남성들을 끌어당기고 그중 우수한 유전자를 선별하기에도 유리했다.


「총·균·쇠」의 저자 제러미 다이아몬드는 1997년에 저술한 「섹스의 진화」에서 이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친자 확인의 중요성


사자나 침팬지는 무리 내의 어린 새끼가 자신의 유전자와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면 죽이고, 새로운 교미를 시도한다.

인간의 남성 역시 여성이 기르고 있는 아기가 자신의 자식임을 알 수 있어야 여성의 곁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려 했을 것이다.


더 먼 원시 시대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곁에 머물며 다른 남성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했고, 농업혁명이 시작된 이후에는 여성이 남성의 집에 시집을 오게 되었다.

왕, 영주, 귀족, 양반 등 권력이 있는 남성은 많은 부인을 두었고, 평범한 남성은 한 명의 부인이면 충분했다. 부부 한쌍이 여러 명의 아이를 기르는 것만 해도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도 여전한 남성의 관심사는 친자 확인이었다.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식이 대를 이어 잘 살아나가야 하는 것은 유전자적 본능이었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서양에서 여성들이 정조대를 찼고, 동양에서 여성들이 유교적 정절을 지켜야 했던 억압적인 문화는 모두 같은 맥락의 산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친자 확인은 문명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식에게 좀 더 많은 지식과 경험과 재산을 나눠주고 싶어 했기에, 인류의 문화는 대를 이어 전승, 축적되어 올 수 있었다.



현대의 성과 과거의 유전자


남녀의 이러한 성 전략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은 단순히 유전자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의 양적 번식과 여자의 질적 번식 전략이라는 기본적인 속성,

긴 육아기간으로 인한 여자의 성 전략 변화,

남자의 친자 확인 속성,

그리고 법과 문화와 종교,

자본주의 양극화,

피임과 장수 등 기술의 발전,

양성평등 가치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인간의 성은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남녀 성의 유전자적 역사와 기원, 그리고 그에 따른 차이를 한번쯤 짚고 넘어가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는 이성 탐색, 교미, 잉태, 출산, 양육이라는 동물적 본질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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