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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성(性) 전략을 결정한다.

양으로 승부하거나 품질로 승부하거나

by 공상과학철학자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수컷 냄새


이곳은 호주.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이 확실친 않지만, 수컷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는 침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둘러본다. 주변 소품의 배치를 바꾸기도 하고, 길가의 꽃을 따다 침대 프레임에 장식하기도 한다. 들어오는 입구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없는지 세심히 점검한다.

아마도 이성을 맞이하려는 모양이다.



이 섬세한 성격을 가진 정체의 주인공은 바로 바우어(bower)새 수컷.

호주 대륙을 무대 삼아 살아가는 현지 토종 조류다.


바우어새는 형형색색의 꽃잎, 열매, 플라스틱 조각으로 숙소를 장식하는 새다.


이렇게 수컷들이 숙소를 꾸며놓으면, 암컷은 바깥에서 예술성을 평가하고는 마음에 드는 숙소 안으로 들어간다.

암컷을 맞이한 수컷은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는 춤과 소리를 내는데, 암컷은 이를 지켜본 후 숙소 안에서 교미할지 아니면 나갈지 결정한다.

교미를 허락한 암컷도 교미를 마친 후에는 숙소를 나간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둥지를 새로 지어, 그곳에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 즉 수컷이 만든 숙소는 알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오직 구애와 교미를 위한 침실의 용도였던 셈이다.


바우어새의 수명은 약 10년 정도인데, 봄 여름철 이렇게 교미 후 알을 낳고 새끼를 길러 독립시킨 뒤, 다음 해 봄 여름철이 되면 암컷은 다시 수컷의 침실을 찾는다. 작년의 수컷 말고 다른 수컷의 침실로..

즉 바우어새 암컷은 일생동안 8~9마리의 수컷과 교미를 하게 된다. 유전자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 바우어새에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암컷은 비교적 고른 교미 기회를 갖는 반면, 수컷은 그렇지 못하다. 암컷들은 수많은 집들 가운데서 눈에 띄는 한집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소수의 수컷이 교미를 독점하고, 나머지 수컷들은 그렇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된다. 다만 수컷들끼리 폭력이나 힘싸움이 아니라, 예술 경쟁으로 승부를 가리니 그나마 평화적인 페어플레이라고 봐야 할까?

먹이를 구해 먹는 것 외에는, 활동 시간의 대부분을 숙소 꾸미는데 쓰는 바우어새 수컷에게는 짝짓기가 인생 최대의 과제일 것이다.



다양한 性전략


동물들의 성별에 따른 짝짓기 방식은 몇 가지로 나눠진다.

다부다처, 일부다처, 일부일처, 동성애 또는 무성애 방식이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생존 환경이 여유롭냐 터프하냐의 차이에 기인한다.

무리인가 단독생활인가, 서열이 있는가, 부계인가 모계 권력인가, 유아기가 긴가, 수컷의 친자 확인이 가능한가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원인이 되겠지만, 가장 절대적인 것은 살아가는 환경의 유불리다.


생존 환경이 여유로울수록 생물은 양적 번식을 추구한다. 자원이 풍부하다면 많은 새끼를 낳아도 생존율이 높을 것이므로 다부다처의 경향이 높다.


일부다처는 수컷 중 우수한 유전자만 퍼지는 구조다. 조금이라도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새끼가 태어나야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일부일처는 양이 아닌 질적 번식으로 승부를 본다. 환경이 터프할 때는 무작정 많이 낳는 것보다, 소수를 낳아 육아에 투자하여 확실한 생존율을 높이는 것이 종족의 대를 잇는데 유리하다.


동성애나 무성애는 출산을 억제하고, 이미 태어나 있는 새끼들의 육아를 보조로 돕는 구조가 된다. 극단적인 환경의 열악함이 아마도 동성애와 무성애의 출현 빈도를 높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아프리카 남과 북으로 서식지가 다르지만, 생김새가 매우 비슷하다. 둘의 유전자 차이는 0.4%에 불과한데, 생물학적 시간으로는 비교적 최근인 약 200만 년 전부터 갈라져 나온 이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성적 행동에는 차이가 있다.



다부다처 사회: 보노보


보노보는 모계사회다. 50~100마리 정도가 무리를 이루며, 암컷들이 연합해 주도권을 가지고 무리를 통치한다.

수컷은 연합이 없는 개인플레이다. 권력이 암컷에게 있다 보니 수컷은 어미의 권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보노보는 침팬지에 비해 싸움도 폭력도 거의 없는 평화로운 사회다. 자원이 풍부하고, 포식자도 적다. 그리고 다부다처. 자유로운 연애, 빈번한 연애를 한다.

암컷들이 적극적인 공동 육아를 하기 때문에 양육의 부담도 적은 편이다. 그래서 보노보는 수컷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육식보다는 채식을 많이 해서 수컷의 사냥이 굳이 필요 없으며, 짝짓기 상대 수컷을 암컷이 먼저 고른다(가끔 고기도 먹고 싶으니까).

인간사회의 잣대를 댄다면 보노보는 수컷도 암컷도 행복지수가 높을 것이다. 수컷은 침팬지처럼 피 튀기는 서열 경쟁을 할 필요도 없고, 암컷은 수컷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생활이 안정돼있어서 세로토닌도 잘 분비되고, 교제가 자유로워 옥시토신 도파민도 자주 얻는다.

다만 안정은 문명의 발전을 더디게 한다. 보노보의 도구는 침팬지만큼 다채롭고 정교하지 못하다.



일부다처 사회: 침팬지


침팬지의 서식지에는 천적들이 많다. 표범, 사자, 비단뱀, 그리고 인간.

침팬지는 부계사회이며, 수컷들이 연합을 이루고 알파수컷 중심으로 무리를 통치한다.

기본적으로는 알파수컷 한 마리가 무리 내 짝짓기 기회를 독점하는 일부다처의 형태다.

그렇다고 다른 수컷에게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알파수컷의 통치가 시원치 않을 경우 다른 수컷들이 또 다른 연합을 이뤄 알파수컷을 몰아낼 수 있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수컷들이 암컷들과 몰래 교미하거나, 암컷들도 알파 외 다른 수컷과 교미를 선호한다.

이는 어느 수컷의 친자인지를 불분명하게 해서, 수컷들에게는 '혹시 내 친자일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품게 만든다. 그래서 암컷은 수컷들로부터 육아의 지원을 얻고, 혹시 모를 알파수컷 교체 시의 영아살해를 방지한다.

결핍은 문명을 발전시킨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수컷 중심으로 일부다처의 강력한 무리를 형성하고 도구를 발전시켜 왔지만,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 보인다.

알파수컷은 알파수컷대로 늘 권좌를 지키지 못한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베타수컷들은 자원과 교미의 기회를 적게 얻어 불만족스러우며, 암컷은 늘 수컷의 눈치를 보고 자식이 영아살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일부일처 종사


보노보의 다부다처와 침팬지의 일부다처.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인 일부일처가 있다.

일부일처는 주로 척박한 환경, 긴 양육기간, 수컷의 효과적인 친자 확인, 수컷의 육아 참여 등이 맞물려 일어난다. 펭귄, 앵무새, 긴팔원숭이가 그렇다.

이들은 일부일처를 하기에 수컷도 자신의 친자를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육아에 애착을 가진다. 소수의 새끼를 잘 길러내어 대를 이은 유전자 존속에 보다 유리하게 된다.



동성애, 무성애


좁은 동물원 우리 안에서 열악한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동물들은 더 높은 동성애 비율을 보이거나, 아니면 교미 자체에 무관심해지는 경우가 있다. 새끼를 낳지 않고 이미 태어난 새끼들을 돌보는 사회적 육아를 거드는 것이 종 전체의 존속을 위해 유리하다는 유전자의 집단 지성일 수 있다.



다음화 예고: 사람의 性에 대한 질문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의 일부일처제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인 보노보, 침팬지와 사뭇 다르다.

일부일처제는 펭귄처럼 본능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 약속의 산물일까?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세대 역시 열악한 사회 환경을 반영하는 유전자의 집단지성은 아닐까?


다음 화에서는 바로 인간 성(性)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자.

性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존속에 중요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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