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코스모스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사회를 탐구해 보며, 함께 살아감을 생각해 보는 철학 시리즈입니다.
화려한 브랜드 옷을 걸치고 은은한 향수를 뿌린 채, 부드러운 말로 속삭이는 남성.
오늘도 클럽에 나와,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25세 조급함 씨다.
요즘 유행어로는 조급함 씨를 가리켜 '여미새'라고 일컫는 모양이다.
옛날 말로 치면, 호색한, 색마, 바람둥이, 작업남 등과 비슷하다고 할까?
공통점은 모두 경멸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
그런데 화려한 겉과 향기는 조급함 씨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
가을철이면 은은한 향기를 내며 하양, 연분홍, 핑크 꽃잎을 우리에게 내미는 코스모스.
이 코스모스의 꽃말은 순애(純愛, 순수한 사랑)다.
순애는 영어로 번역하면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 정도로 번역해 볼 수 있겠는데, 성적 욕망을 배제하고 감정적으로 교류하며 한 사람을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뜻한다.
코스모스는 청명한 가을을 맞이해 사람의 감성을 깨우지만, 실제 이 꽃의 목적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향기와 색으로 꿀벌을 불러들여 달콤한 꿀을 나눠주지 않는가.
꿀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꿀은 유인 도구일 뿐, 실제로는 꽃가루를 운반시키기 위함이 목적이다.
꿀벌은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꿀을 모으고, 그 과정에서 코스모스 수술의 꽃가루를 다른 꽃의 암술에 옮겨 수정을 돕는다. 그 결과 수정된 씨앗이 만들어져 다음 세대의 코스모스가 태어난다.
코스모스의 고운 자태와 향기의 목적.
사람에게 고운 색을 보여주고 꽃향기를 맡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번식을 위함이다.
화려한 옷과 향수를 이용해 여러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조급함 씨와 코스모스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코스모스의 수술에서 나온 꽃가루가 여러 꽃들의 암술을 노리는 성격은 우리 인류가 이름 지었던 '순애'라는 꽃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번식 본능은 코스모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된다.
생명체의 번식 본능이 얼마나 강한가 하면, 오직 번식을 위해 태어나는 존재도 있다.
✔️수벌
여왕벌이 하늘로 비상하면 수벌들이 교미 비행에 동참한다. 그리고는 죽는다.
교미에 성공한 수벌은 생식 기관이 암컷 몸에 박힌 채 내장이 찢어져 죽고,
실패한 수벌은 집단에서 쫓겨나 굶어 죽는다.
✔️사마귀와 붉은등거미
이 곤충들의 수컷은 교미를 마친 직후, 때로는 암컷에게 잡아먹힌다.
그 몸은 산란을 준비하는 암컷에게 영양분으로 제공된다.
심지어 교미에 성공하지도 못한 채, 시도만 했다가 잡아먹히는 경우도 있다.
✔️연어
강에 올라 산란을 마친 암수 연어는 탈진해 죽는다.
✔️매미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로 5년을 살고 성충이 되어 한 달 정도 살다가 알을 낳고 죽는다.
그 한 번의 번식을 위해 삶을 모두 소모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벌·사마귀·거미·연어·매미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는 번식을 위해 극단적인 희생까지 감수하기도 한다.
이렇게 강한 번식욕은 모든 생명의 현재 존재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된다.
사람의 번식 본능도 마찬가지로 강하다. 조급함 씨처럼 여성들을 좋아하는 유전자가 남성에게 없었더라면, 인류는 벌써 오래전에 대가 끊기고 멸종했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돌이켜 본다면, 경멸 섞인 시선을 받는 조급함 씨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급함 씨의 문제는 여성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아마도 여성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바로 남성을 고를 선택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것.
여왕벌도, 여왕개미도, 암사마귀도 결국 수컷을 고르고 선택하는 것은 암컷이다. 코스모스의 암술도 수없이 모여든 수술의 꽃가루 중 자기 꽃에서 나온 꽃가루는 걸러내 근친교배를 막고, 다른 꽃의 수술에서 온 꽃가루만 선택적으로 수정시켜 유전적 다양성을 만들어 낸다.
조급함 씨가 경멸조의 조롱을 듣는 이유는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만약 거절을 당했다면 쿨하게 물러나야 하는데, 싫다는데도 스토커처럼 집착하고, 심지어는 성희롱에다가 상대 의사를 무시하는 강압적 태도까지 보이는 등,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성이 남성에게 먼저 구애하는 선택권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조급함 씨의 친구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짝짓기는 동물이든 사람이든, 구애를 수컷이 먼저 하든 암컷이 먼저 하든, 암수 서로의 동의 하에 이루어진다.
조급함 씨는 수사마귀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른다.
(조급함 씨가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다음 화는 조급함 씨를 위한 내용을 구성했다. 여성이 진짜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유전자는 '생존'과 '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번식이라는 단어를 조금 길게 풀어본다면, '대를 이은 생존'이다. 그리고 개체는 이 번식을 위해서, 짝짓기를 할 수 있도록 건강하게 생존해야 한다.
결국 유전자의 본능에 대한 정의는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유전자의 목적은 '번식'이며, 생존은 그 번식을 위한 과정일 수 있다고.
조급함 씨가 성평등 문화가 정착된 사회에서처럼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쿨한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도 전통적 유교 관습에서 벗어나 그를 더 이상 '여미새'라는 경멸스러운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그의 번식 본능은 결국 인류를 지속하게 한 위대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열린 시각과 상대를 향한 존중이 공존할 때, 우리는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번영 모두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코스모스의 번식이 우주(cosmos)의 질서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