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의 나이테는 선을 긋고 >
엄마의 이팔청춘은 시집에서 보낸 시간들이다. 돌아보면 거리 감각도 없지만 시집온 이후 한 번도 가지 못한 고향이다. 친정아버지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의 그늘에 더 머물러야 할 나이를 일찍 건너뛰었다. 언니와 오빠의 귀여움을 받으며 지내던 오붓함은 가슴 깊이 새겨진 그리움이다. 두 남동생 그리고 두 여동생 등과 함께 7남매가 한 지붕 아래에서 웃음꽃을 피우던 그림은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키는 다 자랐는지 153cm에 머물러 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시어머니께서 저녁이면 지난해 혼자가 된 연실이네 집으로 자주 가셨다. 시어머니보다 한 살 아래인 연실 엄마도 일찍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외동딸을 키우며 지냈는데 딸이 같은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과 결혼을 하여 시댁으로 가는 바람에 혼자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이제는 더욱 연실 엄마도 시어머니도 지내온 얘기를 주고받으며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가까운 이웃이 되리라 기대한다. 그런 날이면 꼬마 색시는 시어머니의 감시를 의식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신랑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편안히 안길 수 있다. 성숙한 남자 냄새가 물씬 코끝을 자극한다. 신랑도 꼬마 색시가 그동안 성숙해져 제법 어른스럽게 보인다. 다가와서 안긴 색시를 있는 힘을 다해 꼭 껴안아 준다.
"여보.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신랑에게 어린 색시가 하는 말이다.
"뭐가 말이오.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야지." 아홉 살 되던 해 서당 훈장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신랑인 남편은 일찍 소년 가장이 되었다. 어린 어깨에 지게를 지고 무거운 가장의 책임을 지고 달려왔기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남의 땅만 갖고는 살 수 없는 것이지요. 돈을 모아 조금씩이라도 땅을 사야겠지요."
" 나도 걱정은 걱정이야. 이제 아기도 생길 것인데 우리 같이 저축할 계획을 세워 봅시다."
생각하고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일본 사람들의 지배 아래에서는 그런 계획마저 허공을 향한 헛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냥 주어진 여건에서 하루하루 성실한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농촌 생활은 큰 변화는 없다. 여름에 보리를 베어낸 밭에 고구마를 심고 한쪽에는 콩을 심는다. 참깨 씨앗을 뿌린다. 고춧대는 이미 많이 자라고 있는 중이다. 매일 살펴야 할 뿐 아니라 남의 집의 일을 해야 품삯이라도 벌 수 있으니 부지런해야만 한다. 밤에도 삯바느질을 맡아하느라고 졸린 눈에 바늘로 찔리는 일도 더러 생긴다. 열심히 앞만 보고 일하면서 사노라니 세월은 빠르게 흐르고 있다.
가을은 모든 게 넉넉한 계절이다. 고구마는 겨울 양식으로 채워지고 콩은 시장에 내다 팔아 쌀과 바꾼다. 참깨는 두었다가 기름을 짜고 고추는 가루 내어 김장할 때 쓴다. 버릴 것 없는 귀한 농산물들이 아닌가. 바쁘게 지내다 보니 논과 밭의 수확은 벌써 끝이 났고 겨울 준비에 들어간다. 이팔청춘의 막을 내리는 한 장 남은 달력이 벽에서 내려다본다. 대설이 지나고 있다.
엄마는 문득 날짜를 세어 본다. 와야 할 손님이 오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다. '이를 어쩌지.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아기를 갖는다는 것인가?' 그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서 걱정을 안고 지내게 되었다. 씨앗을 심어준 남편에게도 그리고 시어머니에게도 아직은 비밀이다. 그렇게 엄마의 열여섯의 겨울은 씨앗을 살 찌우기 위해 남모르는 고통을 안고 지내야 하나보다. 오늘에야 하늘에서 첫눈이 하나 둘 춤을 추며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