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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Mar 25. 2022

사랑에 관한 짧은 소설

삶이 증상이라면, 삶을 치료하면 무엇이 남나요.

이 우주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종종 메세지를 보내곤 했지.


"뭐 해?"

"밥 먹고 있어"

"뭐 먹는데?"

"오징어 젓갈 반찬"

"맛이 어때?"

"그냥 먹는 거지 뭐"


그런 식이었다. 인생은 늘. 그냥, 하는 거지, 뭐. 살기 위해서. 살아 있으니까.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더 괴로워진다. 나는 종종 책을 읽곤 했지.


"타인의 생명을 확인하는 일은 나의 생명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생명을 확인하는 일은 나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잠에서 깨면, 눈을 뜨면, 어김없이. 메세지를 또 보내야만 했다.


"잘 잤어?"

"응, 너는?"

"나는 잘 잤지"

"악몽을 꾸진 않았고?"

"응"


악몽을 꾸진 않았고.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어쩌다 나 따위에게도 되돌아오는 그 짧은 질문이 좋아서. 너무 즐겨버렸다.


나는 그저, 모를 뿐이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지. 그래서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땀을 흘렸다, 온종일. 네가 돈을 좋아해서 나는 돈을 벌었어.


내 주위를 조깅하듯 바삐 걷는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나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나여야만 해."


나는 사실 이해가 안 됐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말귀를 꼭, 아는 체를 했지만. 이 황량한 우주에서, 어떻게 하면 나자신이 일순위가 될 수가 있어? 거울과 같은 황량한 하늘에 비친 나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때면, 그곳에 보이는 건 내가 아니라, 줄곧 타인이어왔다. 종종 아무도 곁에 없어서 거울에 내가 비칠 때, 그러니까 아무런 비유도 이 세상에는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오면은 나는 내 생명을 가장 느낄 수가 없었다. 타인의 생명을 확인할 수 없는 나 자신은 너무 무쓸모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일찌감치 알고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는 홀로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을 거라는 것을. 남들이 모두 저 홀로만의 삶에 몰두하면서 돈을 벌어재끼는 동안에, 나는 낙오자가 되는 걸 택할지언정, 혼자가 되는 것은 택하지 않을 거라는 건. 그건 이 황량한 우주에서 내 육신과 영혼이 황량해지는 가장 빠른 길일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갖다 바칠 만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학위가 필요했고, 그래서 수업을 들었다.


"자기확신이 없는 사람이 남 의견에 잘 휘둘리고 쉽게 우울증이 생겨요."


나는 자기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러한 에너지나 힘, 배경 따위가 늘상 궁금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질문을 받기보다는 질문을 하는, 위치였다. 살면서 무엇이 (그렇게도) 재미가 있나요? 무엇이 당신을 살아가게 하나요?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들,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의사는 나를 진단하면서 한 단어로 내 증상을 그릇에 담았다. 그릇의 이름은 공허감이었다. 첫 번째로, 나는 공허감의 실체가, 고작, 공허감이라는 이름의 그릇에 담기는 일이 언짢았다. 공허감, 그것의 진짜 이름은 말이죠, 삶입니다. 마치, 텅텅 빈 그릇처럼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삶이라는 공허감이 고작 극복의 대상이 될 만한, 증상 따위로 분류되고 명명되는 것에 현기증이 일었다. 잠시동안, 어지러웠다. 삶이 증상이라면, 삶을 치료하면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나요. 아마도, 사랑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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