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그 작고도 거대한 씨앗에 대해서
[1부]
1
아영이는 수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수진이에 따르면, 수진이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다. 아영이는 수진이가 자기 집에 제발 좀 놀러왔으면 한다. 불행하게도, 아영이네 집에는 고양이가 두 마리나 있다. 불행하게도, 털이 아주 많이 날리는 두 마리다.
2
수진이는 검은 옷을 즐겨입는다. 수진이의 말에 따르면, 수진이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다고 한다. 아영이는 역시 수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수진이의 부슬부슬한 검은색 면가디건 외투의 등 부분에는, 불행하게도, 매번 하얀 털뭉치들이 붙어있다. 그걸 수진이 자신만 모르는 것 같다. 아영이도 수진이의 등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이것은 분명히 동물의 털이란 말이다.
3
수진이는 집에 키우는 동물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아영이는 수진이가 왠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아영이는 수진이가 자기 집에 제발 좀 놀러왔으면 좋겠다. 불행하게도, 수진이는 아영이의 초대를 아주 고상한 방식으로 늘 거절할 수 있는 좋은 이유가 있다. 수진이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다고 한다. 아영이네 집에는 고양이가 두 마리나 있다. 털이 아주 많이 날리는 두 마리다.
4
아영이는 수진이가 자기 집에 놀러올 수 없다면, 그대신 수진이네 집에라도 제발 좀 초대받고 싶다. 수진이는 자기 집에 아영이를 절대 초대하지 않는다. 아영이는 수진이가 어쩌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수진이는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늘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게 아무리, 아영이여도. 그게 아무리, 사랑하는 아영이일지라도.
5
불행하게도, 어제, 수진이는 열이 많이 나서 오늘 학교에 못 나온다. 지금 아영이는 가정통신문을 전해주러 수진이네 집 앞까지 찾아온다. 아파트 공동현관을 지나, 엘레베이터를 타고, 12층에 사는 수진이의 문 앞에 당도한다. 야옹,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아영이는 자기 귀를 의심한다. 아영이는 수진이를 의심한다. 아영이는 아마도 수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6
문이 열리고, 수진이는 아픈 기색이 역력해서, 고마워 하면서는, 아영이가 건네는 가정통신문을 고운 손으로 받아든다. 아영이는 한 발자국만 더 들어가면 알 수 있을 진실이 너무나 알고싶다. 하지만 금단의 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진이가 딛고 선 땅과 아영이가 발디딘 땅의 그 사이에는 현관문을 받치는 문턱이, 각이지게 튀어나와 있다.
아영이는 ... , 지금 생각한다.
알고보면 수진이가 고양이를 키우는 거라면?
고양이를 키운다고 왜 말을 안 해주지.
알고보면 수진이에게 고양이 알레르기가 없다면?
왜 우리집에 안 놀러오지.
알고보면 수진이가...... .
알고보면, 알고보면, 알고보면.
7
수진이는 문 안쪽에 서서는 반쯤 열린 현관문 너머로, 아영이의 탁한 눈빛을, 응시한다. 아영이는 가정통신문을 건네고 나서도 잠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보인다. 수진이는 오늘은 이제 그만 아영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아영이는 수진이의 등 너머의 무언가 들이 너무나 보고싶다. 수진이도 그걸 감지한다.
수진이는, 아영이가 알 수 없는 것까지도 알고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수진이 자신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 알 수 없는 것. 까지도. 수진이는 아영이의 열망에 조금은 놀란다. 수진이는 집에 누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 그게 아영이여도. 그게 아무리, 사랑하는 아영이일지라도. 수진이는, 아영이를 12층으로 부르지 말고 내가 그냥 직접 1층까지 내려갈걸 그랬나, 하고 생각한다. 기껏 문앞까지 찾아온 아영이를, 제발 좀 초대 받고 싶어했던 아영이를, 불행하게도 이대로 매정하게 돌려보내기는 이상해진 상황인 것 같다.
8
아영이는 저편을 보고자 하던 열망으로 가득찬 그 눈길을 거두고 입을 뗀다. 이만 돌아가볼게, 몸 잘 챙기고, 내일 보자. 수진이는 고열로 아픈 기색을 감추려는 듯, 몸이 아파 상기된 얼굴이면서도 빙글빙글 웃으며 아영이에게 고개를 끄떡인다. 아영이는 뒤돌아서고, 그 순간 수진이의 방을 상상한다, 불행하게도, 어쩌는 수도 없이. 수진이의 방에는 분명 고양이가 있다...... . 아영이가 돌아간 뒤, 수진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역시. 왠지. 어쩌면. 아마도. 불행하게도 고양이가 있다.
[2부]
수진이는 오래된 이부자리에서 자꾸만 동물 털 같은 것이 삐져나오는 것이 깨림직했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잠시라도 침대에 걸터있나 하면은 흰 뭉치들이 자꾸만 수진이가 좋아하는 검은 옷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수진이는 그 전까지만 해도 오래된 이부자리에 아랑곳하지 않았었다. 그 어른이 질문으로 가장한, 날이 선 말로 수진이의 마음을 베이게 하기 전까지는.
너는 늘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더라.
친구들이 먼지 붙었다고 말 안 해주니.
네 곁에만 가면은 자꾸만 옆 사람한테까지 먼지가 들러붙더라.
집에 어머니가 안 계시니.
하는 것.
수진이는 아영이가 너무 좋았다. 수진이는 아영이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아영이의 옷에 흰 뭉치들이 붙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 수치심이었다. 오래된 이부자리와, 먼지 덩어리 같은 흰 털뭉치들이 날리는 꼴을 아영이에게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터였다.
수진이는 아영이가 너무 좋았다. 수진이는 줄곧, 아영이네 집에 놀러가서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도란도란, 하고. 하지만 수진이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고, 아영이네 집에는 털이 아주 많이 날리는 두 마리나 있었다. 수진이는 많이 아쉬웠다. 수진이는 집에 들지도, 집에 들이지도 못하는 자기 처지를 아영이가 정말 이해해줄 수 있을지 이따금씩 겁이 났다. 수진이가 아영이와 가까워지기 전에, 수진이의 한때 친했던 친구들은 지금 수진이의 곁에 없으니까.
수진이는 무엇이 문제일지 오래토록 생각해 보았지만, 오래된 이부자리에서 비롯된 무언가 때문인지도, 수진의 오래된 고양이 털 알레르기 때문인지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수진 자신 때문인지도.
아영이는 수진이의 불행한 삶을 불행하게 바라보지 않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수진이는 아영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 수진이는 아영이라면 이해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진이는 아픈 기색이 역력해서, 고마워 하면서는, 아영이가 건네는 가정통신문을 고운 손으로 받아든다.
수진이는 생각한다. 아마도, 아영이는 한 발자국만 더 들어가면 알 수 있을 진실이 너무나 알고싶겠지. 하지만 금단의 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진이가 딛고 선 땅과 아영이가 발디딘 땅의 그 사이에는 현관문을 받치는 문턱이, 각이지게 튀어나와 있다.
수진이는 문 안쪽에 서서는 반쯤 열린 현관문 너머로, 아영이의 탁한 눈빛을, 응시한다. 아영이는 가정통신문을 건네고 나서도 잠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보인다. 수진이는 오늘은 이제 그만 아영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수진이는 생각한다. 어쩌면, 아영이는 수진이의 등 너머의 무언가 들이 너무나 보고 싶은 걸 거라고.
수진이는 왠지, 아영이가 알 수 없는 것까지도 알고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수진이 자신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 알 수 없는 것. 까지도. 수진이는 아영이의 열망에 조금은, 아니 사실 아주 많이 놀란다.
그 열망 때문일까. 수진이는 역시 아영이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이제 수진이는, 줄곧 다짐한다.
이만. 나의 오래된 고양이를 죽이는 게 좋겠어.
아영이가 그렇다고 믿는 한, 수진이의 방에는, 불행하게도 고양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건 수진이 자신뿐이라는 걸, 수진이는 알게 된다.
나의 그늘이 좋다고 하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이 순간에도 가난한 나의 마음인데도
넌 왜 웃어 보일까
미운 말을 쏟아내 상처 주긴 쉬운데
넌 왜 아직 거기 서 있는데
해는 뜨지 않는데 내게 기댄
너는 나의 그늘이 좋대
어둠이 내리고 모두 떠나가도
가깝지 않은 곳 어디에서 너는
나의 믿음이 되어
아
나의 그늘이
윤지영 - 나의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