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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Mar 25. 2022

연주의 폭포

여성서사 단편소설

연주는 가만히 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집 근처 공원에 있는 폭포에서 콸콸 흐르는 물줄기였다. 세로로 곧게 떨어지다가 고인 물과 수직으로 맞부딪치면 온갖데로 튀었다. 연주에게 의미란 꼭 그런 것이었다. 곧게 생각하려다가도, 금세 온갖데로 튀어나가 버리는 것. 누군가가 벌써 정해놓은 의미대로 생각하려다가도, 순식간에 연주만의 것으로 변모하는 것. 연주는 스스로를 공상가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연주는 찬미와 두 번째 만났을 때,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다가 찬미의 오른 어깨에 뺨을 부볐다. 안 그래도 쫄아있던 찬미는 깜짝 놀라서 연주와 눈도 못 마주쳤다. 연주는 그저 뺨을 찬미의 오른 어깨에 대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찬미는 우물쭈물대었다.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연주는 표정 하나, 자세 조금 바뀌지 않고 물었다.


"뭐가-빨라?"


찬미는 그야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아니, 아무리 사귀는 사이여도, 이렇게 해도 되냐는 거지. 우리 사귄 지 며칠 안 됐잖아."


연주는 찬미의 오른 어깨에 기댄 채로 싱글싱글 웃었다. 연주는 찬미가 귀여웠는데, 조금 서늘한 의미에서 꼭 그랬다. 어깨에 기대는 행위는 사랑하는 사이에 하는 거구나. 사랑하지 않아도 어깨에 기댈 수 있는 건데, 찬미는 모르는구나. 연주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다소 섬짓한 생각이었다.



생각의 조각들은 연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연주는 이따금 생각, 하지 않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새로운 생각이, 생겨나자마자 연주 자신의 허락도 없이 연주를 구성하는 꼴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주가 구성한 생각은 다시 연주를 구성했다.

연주에게, 세상의 규칙이란 규칙은, 모두 곧게 떨어지는 폭포수 같은 의미의 체계적 확립이다. 연주는 곧은 물줄기를 혐오했다. 그리고 연주는 그 끝으로부터 온갖데로 튀어나가는 작은 물방울을 사랑했다. 아주 많이 사랑했다. 연주는 언젠가 벽에 기대 주저앉아 혼이 나간 사람처럼 흐느껴 울던 날 밤이 생각났다. 연주는 그날밤, 의미도 없이, 근처에 서 있는 부에게 물었다. 아니, 외쳤다.


-왜 모든 똑똑한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들죠?


힘든 환경이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는구나. 연주는 스스로 답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


무력감이 연주를 지배한 밤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온갖 무력함과 이어진다. 그 사람이 여기에 있다, 내 눈앞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정말로! 손으로 그 사람의 어깻죽지를 쓰다듬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내 존재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입힐 수 없다. 해를 입힐 수도 없으며, 이롭지도 못하다. 그저 내 존재와 상대방의 굳건한 분리 장벽만이 존재한다. 반면에 우정은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을 의미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은 그 자체로 생이별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



경희는 아주 힘들게 살고 있었고, 그렇기에 아주 똑똑했다. 주 7일을 일터에 나가고, 심지어 직장 안에 자기 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잠을 자는 사람. 삶과 일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단기 계약직 노동자 여성. 아빠라는 사람의 집에는 술병과 담배 냄새로 가득하고, 사람 사는 흔적이 없는 깨끗한 방. 휴대폰 요금마저, 딸이 내주지 않으면 연락이 정지될 만큼 경제력이 없는 무능한 양육자. 연주는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니 경희에게 꼭 자기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래, 그래서 연주가 경희를 사랑했나 보다.



나중에서야 연주는 그 시구가 다시 떠올랐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접했던 김소연 시인의 'i에게'라는 시.


"아직도 너무 좋은 것은 좋아서 안 된다며 피하고 사니?"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나 후에나, 그 시는 연주의 마음을 빨랫판 두들기듯이 마구 패었다. 연주는 항상 도망다니는 삶을 사는 기분이 들었던 걸까?

연주는 경희를 떠나보내고, 더는 그 어떤 피곤한 일도 만나고 싶지 않아졌다. 찬미에게는 연주가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찬미는 사회적으로 능력이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을 것 같은 당찬 사람이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경희와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 달랐다. 연주는 안심이 되었다. 찬미라면, 괜찮아.



인간은 자신이 혐오하던 것을 종국에 닮는다던데. 그게 이런 거구나. 찬미를 만난 순간부터. 이제, 연주의 마음 속 폭포는 곧게 떨어져내리고, 그 폭포는 마법과 같아서 끝에 물방울을 튀이지 않았다. 사람 사는 흔적이 없는 깨끗한 물가. 연주는 이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사랑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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