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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Mar 25. 2022

사랑에 관한 짧은 소설 2

두구두구두... 쾅!


알 속에 갇혀 지낸 지 3,675,492일째.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세계 바깥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G는 알에 누워서 지내는 세상밖에는(only) 알지를 못했고, 그 바깥(outside)은 알지를 못했다. T를 보기 전까지는.


다소곳한 자세로 - 일직선으로 뻗어 차렷, 하고 누워있는 G를 넉넉히 감싸는 정도의 품을 지닌 알(egg)의 내부 굴곡지고 불투명한 흰색 벽면은 G가 볼 수 있는 거의 다였다. 면적으로 따지자면 그렇다. 하지만 그곳에는 작은 창이 하나 나있어서 누운 자세의 G가 주로 취하는 감은 눈과 달리 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면은 마주볼 수 있는 바깥 세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곳은 정확히는 또다른, 알의 내부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흰색의 지평일뿐이었다. 적어도 G에게 있어서는 알의 안팎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없을 만큼 그 모든 것이 하얬다.


G가 3,675,492일째 누워서 해온 일(task)은 주로 눈을 감고 있는 일(work)이었다. 그러면 언젠가 전생에서나 겪었던 것 같은 너른 풀숲 위를 뛰어다니는 G 자신의 모습, 그리고 주위에 함께하는 타인들의 웃음소리 따위가 머릿속에 울려퍼진다. G가 그 모습을 한 시간 동안 상상인지 회상인지 모를 짓으로 어쨌든간에 떠올리고 있으면, G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한 시간의 삶이 더 주어졌다. 때때로 G는 나쁜 생각도 들었다. G가 눈을 감고 그려낼 줄 아는 그 그림 속에서, 자신을 애워싼 타인들은 투명한 존재여서 닿으면 G의 신체를 투과했다. 그것은 G로 하여금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했다. 온몸이 저리고 따갑고 찢기는 감각이었다.


G는 생을 멈춘다면 타인이 자기 몸을 투과할 때 느끼는 고통을 영원히 감각해야 한다는 점을 어렴풋이나마 직감했다. 그래서 G는 생을 절대로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G는 한 시간을 눈을 감고, 또 다른 시간에는 잠시동안 눈을 뜨고 알의 창문 너머 흰 세계를 무심하게 응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확실히, 눈을 감고 있으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아른거리며 그것이 웃음이든 울음이든간에 G로 하여금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에 상당히 피로했다. 게다가 반 정도나 되는 '높은' 확률로, 타생(other life)은 G의 신체를 통과하면서 G에 고통을 안겨주었으니, G는 눈 감고 하는 일을 그다지 사랑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그는 눈을 뜨고 흰 세계를 응시하는 시간을 좀 더 즐겼다(enjoy)고 할 수 있겠다.


G가 알 속에 누워 지낸 지 3,675,493일째 되는 날이었다. G가 처음 T를 본 것은. 알의 내부 벽면과 다를 바 없이 온통 하얬던 알 바깥의 흰 세계에 하얗지 않은 무언가가 등장하자 G는 제 눈을 의심했다. T는 처음에는 직선으로 곧장 씩씩하게 걸어서 유유히 사라졌다. G 시야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G는 그날 어쩌는 수도 없이 그동안 저축해논 모든 일(work)의 대가를 다 사용해서 뜬눈으로 오랜 나날을 버텨냈다. 더는 일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적립된 모든 나날을 다 써갈때쯤, 그러니까 2,274일이 더 흘렀을 때. G는 이미 T에게 "T"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She)만을 기다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T는 나타났다. 직선으로 곧장 걸어 G가 누워있는 알을 향해 다가오는 형태였다.


T는 정확히 세 번을 연이어 두드렸다. G가 들어있는 알의 투명한 창문을. 똑 똑 똑. T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누워있는 G와 T는 아주 오랫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G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일하고 있지 않는 때에 눈물을 흘린 것은 처음이었다. G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T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G는 그동안 자신이 일하면서 울었던 그 많은 날들 속에서 자신의 눈물에도 그저 비웃을 뿐이던 수많은 타생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게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 따위들도 모조리 인간이었다. 아무튼 G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고, 그 첫 눈물에 T는 함께 우는 것으로 - 응답했다.


그 다음에 그 둘은 먼저랄 것 없이 거의 동시에 웃기 시작했다. 헤벌쭉한 미소를 담은 너른 표정의 둘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T의 뒤에서 T의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G의 두 눈을 바라보던 T는 그를 향하던 몸을 뒤로 돌려 정반대의 무언가를 응시했다. G는 아주 한참동안이나 T의 등을 바라보았다. T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몸을 G로 향해 돌려 G를 바라보았다. G는 T가 떠나는 줄로 알고 매우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가, 다시 일어난 눈마주침에 그 이상한 감정을 잊어버렸다.


G는 문득, 자신도 T처럼 알 바깥으로 나가서 같은 공간에서 T를 마주하고, 서로 몸을 만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G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G는 방법을 몰랐다. T는 주머니에서 빨간 버튼이 달린 리모콘을 꺼내더니 G에게 첫 마디를 건넸다.


"내가 이 빨간 버튼을 누르면, 너의 알은 부서질 거야. 그럼 넌 밖으로 나와 나를 만날 수 있지."


G는 그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G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추운 감각을 느꼈다. G는 이상한 감정을 자꾸 만들어내는 T가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문득 잔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T는 웃고있었고, G는 T의 미소를 보면서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G는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저 미소를 더 볼 수 있다면 더는 일하지 않고 평생을 눈 뜨고 있겠어. 그러다가 모아논 시간이 다 떨어지면 그대로 죽고 말겠어. 그래도 되겠어."


T는 G의 입모양을 읽었고,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자극받은 T의 열정은, G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빨간 버튼을 누르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두구두구두... 쾅!


G는 그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을 뜨자 자신이 일하는 동안에 눈을 감고 늘 보았던 그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서있는 G의 주변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서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T는 없었다. G의 주변에 서있는 타생 중 하나인 A가 G에게 말했다.


"나는 T를 보았지.

그의 미소도 함께 말이야."


G는 T의 존재를 아는 A와의 마주침에서 순간적으로 큰 반가움을 느꼈지만, 뒷 문장을 들었을 때, 그것을 압도하는 불길한 감정이 더욱 크게 밀려왔다. 그대로 G는 자신이 결코 T의 미소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그 순간, G의 세상은 갑자기 완전히 뒤바뀌었다. A는 혼란스러워하는 G에게 물었다.


"나는 T의 집주소를 알고 있어.

같이 가서 T를 만날래?"


G는 그러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G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추운 감각을 느꼈다. G는 이상한 감정을 자꾸 만들어내는 T가 차라리 온데간데 존재하지 않았으면 더 좋겠다고 문득 잔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G가 기억하는 T는 환하게 웃고있었고, G는 T의 미소를 보면서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G는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그 미소를 더 볼 수 있다면 더는 일하지 않고 평생을 눈 뜨고 있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러다가 모아논 시간이 다 떨어지면 그대로 죽고 말겠다고 말이야. 그래도 될 것만 같았어. 그런데 지금 나를 봐. 나는 이제 평생 일만 해야 하는 생에 내몰렸잖아. 그리고 T는 내 눈앞에 없어."


A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T를 만나러 가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G는 아주 잠깐의 망설임으로 주춤하다가, 본능적으로 자기 주머니에서 리모콘을 꺼냈다. 빨간 버튼을 눌렀다. 두구두구두... 쾅! G는 더이상 아무런 이상한 감각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파괴를 스스로 맞이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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