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찬바람도 더운바람도 아니었다. 미지근한 온도의 공기. 에워싸는 미지근함의 한가운데에서. 고요했다.
고요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초등학교 5학년생 여자아이다. 아니, 딱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걸맞는 만큼을 알고 있는 아이라고나 할까?
고요는 다른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았고, 그것은 곧 책걸상과 의자 또한 고요의 몸처럼 짜푸러져야 고요에게 잘 들어맞는다는 뜻이었다. 높이가 높은 책상에는 손목이 걸려 제대로 닿지 않았고, 높이가 높은 의자에는 앉을 수 없이 등반하듯 까다로왔으며, 꼭 두 발이 허공에 둥둥인 꼴이었다. 고요의 엄마는 늘 고요에게 두 눈빛으로 욕을 했는데, 그것은 꼭, 네 분수를 알아라, 그런 것이었다.
작은 책상에서 공부하고 작은 의자에 앉혀지는 자그마한 존재. 한 움큼의 동그라미로 규정되는 면적에 갇혀 양육되는 아이. 그게 바로 나잖아. 고요는 스스로 물어보았다. 내가 또래에 비해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것일까? 하지만 난 이제 열두살인걸. 4학년이 아니고 5학년이라고. 내년에는 6학년이고, 그후년이면 중학교에를 입학하는걸. 나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지만 어쩌면 딱 알맞은 만큼 아는 걸 거야.
고요는 수업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높은 음계의 상큼발랄한 리듬을 하루에 열 번도 더 들으면서 점점 그 짤막한 음악에 중독이 되는 듯했다.
고요는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는 잊어버렸으나, 이 종소리는 고요와 아이들을 노동자로 길러내기 위한 학습 장치라고 배웠다. 적어도 누군가가 그렇게 주장한 것을 고요는 접했다. 띠리리-리리. 소리는 고요를 작고 좁은 의자에 철푸덕 앉히기도 하고, 벌떡 그로부터 일으키기도 하는 마법의 음악이다. 고요는 초등생의 집중력은 40분이라서 한 교시의 운영이 40분이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은 수업시간이 5분 더 늘어난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고요는 파블로프의 개에 대해 책에서 읽었다. 고요는 알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저 짧은 리듬에 따라 강제적으로 움직이는 자동화된 로보트들이야.
띠리리-리리. 종소리가 울렸다. 수학시간의 끝을 알리는 명령의 음악적 전달이라고 할 수 있겠지. 고요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소가 턱을 양손으로 받치고 아주 아주 똘망거리는 눈빛으로 고요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기가 채 무섭게 미소는 고요의 자리로 달려왔다. 오늘은 뭘 접을 거야? 고요는 미소의 웃는 얼굴에 가득한 호기심을 느끼자 반사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책상서랍에 고요는 제 작은 두 손을 넣고 수많은 교과서 틈새로 색종이들을 더듬어 찾는다. 파란색. 아니야. 노란색. 이것도 아니야. 갈색... 그리고 연갈색의 단면 색종이. 바로 이거다. 오늘은 다람쥐를 접을 거야. 크게 접는 것보다 작게 만드는 게 더 더 귀여우니까 색종이를 먼저 사등분해주는 게 좋아. 미소는 사부작거리며 뚝딱뚝딱 멋진 일을 해내는 고요의 다부진 두 손을 면밀하게 쳐다보았다. 고요는 아주 반듯하게 색종이를 사등분했다.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손톱을 이용해서 꼿꼿하게 힘을 주어 눌러준 뒤에 찢으면 잘 찢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요는 욕심이 많았고, 미소는 참을성이 많았다. 고요는 미소에게, 색종이를 한 장 더 꺼내어 찢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다람쥐 대가족을 만들 거야. 많이 만들면 다람쥐들이 혼자가 아니어서 외롭지 않겠지. 그리고 더 많은 반친구들에게 선물해줄 수도 있고 말이야. 벌써 열두 번째 색종이 사등분 조각이 만들어졌을 때였다. 미소는 군말없이 좋다고 크게 연거푸 끄덕였다. 앉을 자리도 없어서 고요의 책상 옆에 다소곳이 뒷짐을 지고 서있는 채로, 시간은 흘렀다. 고요는 마치 도자기를 빚는 듯한 정교한 손놀림으로, 그리고 아주 현란하게 사부작였고, 곧 아기 다람쥐 한 마리가 고요의 손아귀에서 탄생했다. 와아! 미소는 입을 크게 벌리고 박수를 쳤다. 띠리리-리리... 고요는 허둥지둥 미소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란 손짓을 하면서도 얼른 잽싸게 미소의 손에 그 작은 아기 다람쥐를 건네주었다. 미소는 정말 기뻤다. 나 가져? 응, 또 접으면 돼. 미소는 환희에 차서 종종걸음으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미소의 신난 표정을 보고나서, 고요는 자신이 몰두해 만들어낸 집적체가 타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 시간의 경과를 알리는, 쉬는시간이 끝났다는 의미의 종소리는 고요와 미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또다시 멀찍이 벌여놓었고, 그 거리상의 간극은 오직 둘 사이의 애틋함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고요는 어느새 지저분해진 책상 위의 부산물들을 허겁지겁 정리한다. 남은 사등분된 열한 조각의 색종이 조각들. 그것은 곧, 열한개의 기쁨과 기대의 조각이자 새 생명을 탄생시킬 잠재적 힘을 지닌 신비한 귀중품이기도 하다. 고요는 색종이 조각들을 가지런히 겹쳐모아서 필통에 슬쩍 꽂아두었다.
여자 국어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수업종이 친 지 6분이나 지났는데. 그 사이,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고요는 김미나 국어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조용히 있었다. 건너편 분단의 친구와 아직도 큰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왼편의 짝꿍에게 슬쩍 눈짓도 하였다. 마치, 조용히 좀 해, 수업시간이야. 하는 것 같은.
김미나 선생님은 마치 연극을 하듯이 수업을 하는 분이시다. 고성의 목소리에서부터 아주 아주 낮은 늪지대의 골짜기 아래로까지 목소리는 쉽게 오갔다. 그러면서 흥미진진하게 선생님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어딘가 칼 같은 면이 있는 중년의 여성이다. 김미나 선생님은 아이들을 이렇게 지도했다. 백삼십육 페이지를 보면, 이렇게 나와있죠. 시간은 금이다. 고요는 그 말이 퍽 재미있게 느껴진다. 시간은 금이다? 금은 시간이다? 둘 다 말이 되나?
띠리리-리리. 미소는 아까 전처럼 고요의 자리로 달려온다. 고요는 김미나 선생님이 계신 교탁 앞으로 달려간다. 둘은 어긋난다.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연극을 하는 수업시간의 김미나 선생님은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이제 더는 그 자리에 없다. 쌀쌀맞고, 아주 차갑다. 대답도 눈짓도 없이 수업자료를 정리하는 김미나 선생님의 곁에 고요는 어정쩡하게 서있다. 질문을 이어간다. 수학에서는 A가 B이면 B가 A잖아요. 그러면 시간이 금이면 금은 시간인가요? 김미나 선생님은 그제서야 고요의 쪽을 응시한다. 그러나 이내 교실을 떠나는 걸음을 하면서 차갑게 말한다. 나중에.
나중에?
고요는 자신의 자라나는 생각을 뿌리채 김미나 선생님이 뽑아서 죽여버렸다고 생각한다. 고요는 착잡함을 느끼고 풀이죽은 표정이 된다. 자기 자리로 터덜터덜 돌아간다. 그곳에는 신이나서 고요를 줄곧 기다리고 있던 미소가 서있다. 미소는 자기 물병의 뚜껑을 자랑스럽게 고요에게 보여준다. 그 위에는 고요가 접어준 작은 아기 다람쥐가 있다. 있지, 이거 다람쥐의 새 집이야. 고요는 말한다.
나중에.
나중에?
미소는 뿌듯하게 들고 있던 다람쥐를 슬쩍 등 뒤로 숨긴다. 아이들은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