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식물을 굉장히 좋아한다. 한때 자취방 베란다에 화분이 100개가 넘었으니 말 다 했지. 하지만 이제 다시 예전처럼 그렇게 아이들을 많이 기르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시간도 아까웠거니와, 현실에 집중할 시기에 식물로 가득 찬 베란다가 정신적 도피처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무엇보다 북쪽 지방이라 짧아진 해와 낮아진 기온에 아이들이 적응할 수는 있을까, 떼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컸는데, 작년 한 해 동안 극악의 환경이었던 학교 기숙사에서도 아네모네 한 포기를 지켜내고 또 세 포기로 불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새로 구한 아파트는 남향이지 않은가!
오랜 고민 후 대구에서 춘천으로 데려와 지금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아이들은 로즈마리와 아네모네, 헬리오트로프, 수련이다. 다들 기특하게도 겨울을 잘 이겨내고 봄을 맞이해서 한껏 신이 났다.
허브를 키우는 것은 경험상 대박 아니면 쪽박이었다. 사실 필요한 것이 그리 많지는 않다. 햇빛, 물, 바람이면 충분하다. 이 세 가지만 잘 맞추어 주면 허브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는다’ 뿐인가? 잘 자란다. 그것도 굉장히 잘 자란다. 꽃도 잘 피어주고, 아로마테라피가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향도 진하게 뿜어 준다. 남향 베란다이니 햇빛은 충분하고, 물은 달라고 조르면 주고, 아침저녁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도 쐬어 주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쉬울 수가! 그리고 아주 조금 더 손이 가긴 하는데, 많지는 않다.
오늘은 꽃가위를 들고 로즈마리를 ‘정리’했다. 봄철에 새순이 잔뜩 올라오면 가위를 들고 새순과 묵은 가지를 정리해주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 새로 돋아날 가지가 좀 더 많아지고, 안쪽에 있어서 바람을 쐬기 힘든 가지도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또 겨울 동안 말라버린 이파리를 없애주면서 아이의 상태를 한번 전체적으로도, 그리고 가까이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이 작업이 없다면 전체적인 모양을 잡을 수 없고, 속 가지들은 죄다 썩어버린다. 가지를 정리해서 빈 공간을 만들어주는 작업은 정말 중요하다.
지난 한 달은 지난 30년과는 달랐다. 항상 할 일이 가득하고, 해내야만 하고, 헤쳐나가야만 하는 일상이 사라졌다. 목표가 사라지니 절로 마음이 느슨해졌고, 뒤에서 밀어주는 스트레스가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분명 평소같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해치울 일들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손에 잡히지도 않더라. 만날 사람은 많았지만 만날 수 없었고, 해야 하는 일은 최소한으로 해 냈다. 미룰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미루었다. 철든 이후 한 번도 제대로 된 휴식이 없었던 삶에 바람 쐴 자리를 만들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집 안에서라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어려웠다. 살던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게.
로즈마리 가지를 정리하지 않으면 속가지가 썩어들어간다는 것은 잘 알면서, 왜 내 삶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쉰 적이 있던가? 아무런 목표 없이, 아무런 부담 없이, 둥둥 떠다니면서 여유롭게, 자고 싶을 땐 자고, 먹고 싶은 걸 먹고, 따뜻하고 안온하게, 편안하게. 이런 날들이 언제 다시 내 삶에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이런 일상이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너무 자주는 안 될 것 같다. 살이 미친 듯이 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