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미안해
어항을 청소하다 수초 밑에서 수첩을 발견했다
젖은 수첩에는 많은 이야기가 번져 있었다
너와 함께했던 순간들의 비통함, 불분명한 적의, 낡은 전개, 텁텁한 터널의 공기, 시답지 않은 시간과 드디어 너와 함께하지 않아 피어오르던 찰나의 심야, 잘못 죽은 석양, 썩지 않는 사과…
그렇게 쌓인 단어들은 수첩 끝에 놓인 미안해로 수렴되었다
그러나 그 미안해는 이미 젖어 힘을 잃은 뒤였으므로 나는 계속 새로운 미안해가 필요했다
그때는 그랬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통로를 씨ㅇ* 욕하며 지나가는 바람에서 너를 떠올리며 미안했다
확고하지 않은 취향이 미안했고 잦은 걱정과 집착이 미안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너무 상쾌한 기분이어서 미안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돋아나는 혐오여서 미안하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든 미안 위로 미안을 계속 얹다가 맨 처음 미안이 기억나지 않게 되어 미안하지 않았다
그렇게 허투루 네게 보냈던 시간이 너무 아까워
수첩 속 내게 미안했던 마음들을 놓아주어도
이제는 괜찮게 되었다
* 인생은 어차피 오독의 연속이지만 혹시나 해서 메모를 남깁니다. ㅇ은 씽의 ㅇ입니다만 내키는 대로 읽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