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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이 Jan 17. 2024

끝의 시작

어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그 끝이 있다. 나는 끝을 정해 놓지 않은 채,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일지 모를 이 이야기의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작의 바로 다음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달님이는 짧은 생을 통해 벌써 두 번의 죽음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외할아버지와 아랫집 반려견 뿌꾸의 죽음이다.   


오랜 시간 지병을 앓아오신 외할아버지는 생전에 단 세 번 만났었고, 뿌꾸는 노환으로 밖을 잘 다니지 못했던 데다 가끔 마주칠 때에도 몸이 아파 예민하게 굴었던 탓에 이 둘의 죽음은 지금보다 더 어렸던 달님이에게 어떤 감정을 남기지는 않은 듯하다. 오히려 그 대신 지적 호기심의 영역을 열어 보인 것 같다.


어느 날 달님이는 이렇게 물었다.


- 아빠, 풍납동 할아버지는 어디로 돌아갔어?


- 응?

 

- 어디로 돌아갔냐구.


숱하게 써 왔던 ‘돌아가시다’의 평어 표현이 ‘돌아가다’였다는 것을 여태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겨우 이해했다.     


- 아, 어디로 돌아가셨냐면, 저 멀리 하늘 너머 하늘나라로 가셨어.


- 엄청 멀어?


- 엄청 멀지. 그래서 한 번 가시면 다시 여기로 오시진 못해.


- 음… 근데 할아버지는 왜 돌아갔어?


-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으시기도 했고, 몸이 많이 아프셨어서 돌아가셨어.


- 아, 뿌꾸도 나이가 많고 아파서 돌아갔지?


- 응, 맞아.


- 그럼 둘이 만났겠네?        


- 아, 그래. 그랬겠다.


- 사람은 다 돌아가?


- 응, 모든 생명은 다 돌아가. 사람도 그렇고 동물, 식물도 모두.


- 나이가 많아져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돌아가는 거지?


- 응, 그렇지.


- 나도 할머니가 되지?


- 응.


- 그리고 돌아가?


- 응.


- 엄마도?


- 응.


- 아빠도?


- 응.


- 할머니도?


- 응.


- 할아버지도?


- 응.


- 그런데 돌아가서 다 같이 다시 만나는 거지?


- 응, 맞아.


이렇게 그날의 ‘돌아감’에 대한 질문은 끝이 났고, 그 이후로도 ‘돌아감’에 대한 질문은 종종 계속되었다. 아마도 달님이는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어느 날,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등장했다.  


- 아빠, 우리 셋 중에서 누가 제일 먼저 태어났어?


- 아빠지.


- 그다음은 누가 태어났어?


- 엄마지.


- 그리고 마지막은?


- 달님이지.


- 그럼 누가 제일 먼저 돌아가?


답을 먼저 정하고 만들어진 달님이의 이 질문은 나에게 생물통계학적 상식인 ‘나이가 많으면 죽을 확률이 더 높다’와 인류학적으로 진리이지만 윤리적으로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명제, ‘가는 데엔 순서 없다’를 충돌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좋은 답을 떠올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럴 때는 논리를 과감하게 부숴야만 한다.   


- 우린 다 같이 돌아갈 거야.


- 잉? 엄마 아빠는 먼저 할머니 할아버지 될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같이 돌아가?


- 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계속 같이 있다가 달님이가 돌아갈 때 같이 돌아갈 건데?


- 아닌데! 내가 할머니가 되면 엄마 아빠는 돌아가는데!


- 엄마 아빠는 아니야. 달님이랑 같이 돌아갈 거야.  


- 힝. 아닌데…


달님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분명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달님이는 이날 이후로 ‘돌아감’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조금씩 이해되고 있는 죽음이, 달님이에게는 불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죽음은 ‘부모의 죽음’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우리 모두는 자식이므로 모두에게 그렇다. 아이는,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고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죽음의 원형은 부모의 죽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아이일 때부터 가지고 있게 된다. 아이들은 자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모가 죽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모든 불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달님이는 이제 그 어떤 것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약속과는 다르게, 나는 언젠가 달님이보다 먼저 돌아갈 것이다.


그때 나는 달님이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아빠이고 싶다. 물건보다도 마음이 남지 않기를 바란다. 그중에서도 가장 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미움, 원망 같은 것이 아닌 후회와 죄책감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갈 때까지 달님이에게 영원히 함께할 것처럼 행복한 매일을 사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큰 욕심을 하나 가져본다면, 내가 돌아간 뒤에 가끔, 혹은 자주 달님이가 ‘나는 먼저 안 돌아갈 건데?’라고 말한 아빠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기를 바라 본다.


달님이는 요즘 여느 아이들과 같이 이렇게 말한다.


- 아빠, 나 오늘 어린이집에서 김치 백 개 먹었어.


- 아빠는 오늘 김치 천 개 먹었는데.


- 나는… 나는… 아빠, 천 다음 뭐지?


- 만.


- 나는 만 개 먹었거든! 근데 아빠, 그럼 가장 큰 숫자는 뭐야?


- 가장 큰 숫자라는 건 없어. 제일 큰 숫자에 1을 또 더하면 더 큰 숫자가 될 거니까.


이렇게 무한대 개념을 알게 된 달님이는 며칠 전 어린이집에 바래다주는 차 안에서, 가만히 창 밖을 보다 뜬금없이 혼잣말처럼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때 지금 적고 있는 끝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 아빠, 마지막이라는 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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