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보면 결국 ‘그’가 서 있다
기획이란 용어를 영어로 하면 뭘까?
문득 궁금해졌다.
기획자는 영어로 뭘까?
사실상 같은 질문, 역시 궁금하다.
기획 = 플래닝(planning)
가장 공식적인 답이 아닐까 싶다. 나도 기획책 내며 ‘기획’을 ‘플래닝’, ‘기획자’를 ‘플래너’라고 표현했었다.
(「기획은 2형식이다」의 영문 타이틀이 ‘The art of Planning code’였다.)
‘플래닝’이 딱히 틀렸다기 보다는…뭐랄까, 내가 지금까지 오랜 시간 해왔던 ‘기획‘이란 일이 ‘플래닝’이란 그릇에 온전히 담기지는 않는다는 느낌적인 느낌이다.
‘플래닝’하면 다이어리 플래너에 꼼꼼하게 일정을 적어 놓는 행위가 연상된다. ‘꼼꼼’은 있지만 ‘톡톡’ 튀는 창의성의 느낌이 빠진 느낌이랄까.
또한 스타트업 씬을 중심으로 기획자를 ‘프로덕트 오너(PO)’, ’프로젝트 매니저(PM)‘, ’커뮤니케이터‘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너무 직무적인 호칭인데다 ‘관리자’의 역할만 부각되는 것 같아 못내 아쉽다.
기획 = 디자인(design)
한 크리에이티브하는 츠타야 서점의 마스다 무네아키 옹의 의견이다. “이제부터는 오직 기획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라고 말할만큼 기획 지상주의자인 그는 흥미롭게도 ‘기획=기획(企劃)‘이라고 칭하고, ’기획자 = 디자이너(デザイナー)‘라고 구분해 표현하는 편이다.
기획의 중요성을 설파한 그의 저서 「지적 자본론」의 부제가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다. ‘디자인’은 분명히 ‘꼼꼼’을 넘어선 ‘톡톡’ 튀는 기획의 창의성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른바 선과 면의 비쥬얼을 디자인하는 그 ‘디자이너’와 구분되지 못하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마스다 씨도 아쉬웠는지 ‘기획’의 영어 표현을 하나 더 제안했다.
기획 = 제안(propose)
그럴 듯 하다. ‘기획’을 ‘제안(propose)’이라고 정의하니 꼼꼼한 논리성도, 톡톡튀는 창의성도 담겨지는 듯 하다. ‘제안’이란 곧 설득을 거쳐야 하는 것이고, 설득하려면 논리성과 창의성 모두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설득’이라는 기획의 숙명까지 담을 수 있어서 참 좋….긴 한데, 역시 뭔가 아쉽다. ‘기획자 = 제안자’라고 하면 ‘제안자 = 기획자’가 성립할까? 즉 기획자는 제안자가 되어야 하지만 제안자는 반드시 기획자가 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이다. ‘제안자’에는 ‘기획자’의 알싸한(?) 그 맛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자장면은 맛이 없고 짜장면은 맛있을 것 같은…그런 느낌?
때로는 사전적 정의가 답을 줄 때도 있다.
행정학 사전은 기획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획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의 변화를 가져올 목적을 확인하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설계하는 것“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기획의 사전적 정의’다. 교과서적인 정의이지만 참 알차게 잘 정의했다고 생각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기획’은 곧 ‘설계’다.
기획 = 설계
문제는 ‘설계’라는 용어의 영어가 뭘까라는 점인데,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이런…, ’설계 = design’이다. 다시 ‘디자인‘으로 돌아온다. 역시 기획의 대가, 마스다 무네아키의 통찰이 정답인 걸까.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기획자는 영어로 ’디자이너‘예요!”라고 인정하려던 순간…,
우리의 현대카드가 대답한다.
‘설계자’는 영어로
‘디자이너‘가 아니라 ‘아키텍트(architect)’라고.
최근 선보인 현대카드의 새 슬로건이 ‘변화의 설계자, 현대카드‘다.(architect of change)
나에겐 ‘기획자, 현대카드’로 읽혔다. 역시 현대카드다. 기획자를 심플하게 ’변화의 설계자‘라고 정의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현대카드’만큼 기획을 잘 하는 브랜드가 잘 없다. 디자인 카드, 투명 카드, 미니 카드, 슈퍼 콘서트, 뮤직/트래블 라이브러리, 애플페이, PLCC등등 지난 20년 동안 늘 새로움을 앞장 서서 기획해 오지 않았는가.
기획자 = 설계자(architect)
게다가 ‘아키텍트’라는 개념은 ‘디자이너’와 달리 꼼꼼한 수학적 논리성과 예술적 창의성을 겸비한 절묘한 용어인 것 같다. ‘건축’이라는 게 엔지니어링과 예술의 융합 그 자체니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말이 좀 어렵다는 것인데, 대중을 상대로 한 브랜드 슬로건으로까지 썼으니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엔지니어링과 창의성을 겸비한 ‘아키텍트’적 기획자까지 오다 보니
결국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로에 서 있던 그 기획자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잡스다.
평생 ‘변화의 설계자’ 그 자체였던 잡스는 기획자를 (영어로) 뭐라고 불렀을까.
영화 ‘스티브 잡스’에 서 창업 동지였던 워즈니악의 불같은 항의에 대한 그의 답변에서 힌트를 볼 수 있다.
[워즈니악] : “넌 프로그램 코딩도 할 줄 모르고 회로 한줄 설계도 하지 않았어. 디자인도 안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널 천재라고 불러. 넌 도대체 한 게 뭐야?“
[잡스] :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야. 너는 악기 연주자고.“
기획자 = 오케스트라 지휘자(Orchestrator)
잡스는 본인의 정체성인 ‘기획자’를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정의했다.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부속품처럼 취급하는 듯한 태도는 당연히 옳지 않지만 여러가지 요소들을 ‘디렉팅(directing)’하는 것이 기획의 본질이라는 통찰은 역시나 훌륭하다. 영화 감독이나 PD등 디렉팅과 연출을 하는 이들을 기획자의 대명사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잡스 본인의 ‘Connecting Things’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정의이기도 하고.
기획자를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정의하는 그의 안목을 높이 사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획자에 대한 그의 시각은 이거다.
기획자 = Thinker
잡스는 기획자를 ‘Thinker’라고 불렀다.
잡스의 생각과 말은 늘 심플하고 쉬워서 좋다.
‘현상은 복잡하고 본질은 심플하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잡스는 본질을 보니까 심플해질 수 있는 것이겠지.
그는 언제나 강력한 대비효과를 사용해 개념을 쉽게 만들었다.
’1984‘ 광고의 ‘골리앗 MS vs 다윗 Mac’ 대비 구도
‘Get a Mac’ 광고 캠페인 ‘Mac vs PC’ 대비 구도
‘블랙베리 등 스튜핏 폰 vs 아이폰’ 대비 구도
IBM 슬로건 ‘Think’ vs 애플 ’Think different’의 대비 구도 등등
마찬가지로 대비 효과를 써서 기획자를 ‘thinker’라고 정의하고 실행자를 ‘doer’라고 표현해 대비시켰다. 쉽고 명쾌하다. 날카로운 메시지도 있다. 기획자란 ‘thinker’인 동시에 ‘doer’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잡스에 따르면 기획자는 기본적으로 ‘사상가’(thinker)가 맞지만, 실행(doer)하지 않는 기획자는 사상가일 뿐이라는 메시지다.
우리 주변에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수년째 늘 생각만 떠벌리는 사람, 뭐뭐 할 계획이라고 말만 하는 사람, 성공한 아이디어 보면서, 저거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거라며 폄하하는 사람, 정작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 (무지 찔린다)
잡스는 ‘기획자 = thinker and doer’로 정의해 그런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기획자 = Thinker and Doer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실행하는 사람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기획자’는 제너럴리스트다. 좁고 깊기 보다는 얕고 넓다.
‘기획’이라는 것이 특정 전문(special) 역량이 아닌, 어느 직무에나 필요한 일반적(general) 역량인지라 늘 애매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면이 있다. 저평가 받는 면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중에 ‘스페셜한 제너럴리스트(special generalist)’도 될 수 있는 법, 잡스 형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결국, 오늘도 ‘기획자 잡스’에게 또 한수 배운다.
‘기획하는 사람은 위대하다.’
p.s
그나저나 ‘기획’은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하나?
아예 ‘gihwek’이란 신조어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