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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사람 가탁이 May 27. 2023

물집이 뭐길래

#2 올레길 19코스, 230526 바다색이 고운 날

아침부터 낯선 이들의 주목을 온몸에, 아니 온 발에 받았다. 바늘로 물집을 터트려 물을 짜내고 소독약을 바른 다음 완충밴드(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다. 약국에 가서 설명해도 잘 모르더라는...)로 감싸주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물집이 안으로 들어가 안으로, 옆으로 세력을 넓혀나간다 했다. 전날 함께한 가이드를 비롯 생전 처음 보는 낯선이 들에게 둘러싸여 관심과 치료를 받고야 말았다.


어제 걷기가 끝날즈음 양쪽 네 번째 발가락 아래의 감각이 조금씩 무디어지는가 싶었는데 숙소에 와서 확인해 보니 양쪽 다 물집이 잡혀있었다. 물집은 제대로 걸은 결과인가, 잘 걷지 못한 결과인가


약간의 걱정을 받으며 19코스 출발을 어디에서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오늘은 거북이반 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거북이반 코스는 토끼반 코스보다 거리 부담이 조금 덜하다)

방향표식 화살표와 리본 찾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하루 경험했다고 이렇게나...

빛깔 고운 함덕해수욕장을 지나는데 모래사장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정다워 잠시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들을 지나고 바다를 지나 서우봉을 오르는 길은 숨이 찼다. 평지를 열심히 걸었건만 오르막을 오를 때는 아직도 호흡이 거칠어진다.

서우봉 낙조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또한 예술이다. 자연이 빚은 작품이다. 정해진 일정 때문에 낙조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것 또한 다음기회로!

해동포구를 지나면서였나? 전날부터 마을 군데군데 보이던 용천수가 신기해서 목을 길게 뽑아 쳐다보고 있는데 정자에서 쉬고 계시던 인자한 얼굴의 어르신께서 가서 물을 먹어보라고 하셨다. 먹을 수 있다고, 심지어 물 맛이 좋을 거라고, 마을에 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모두 그곳에서 물을 길어먹었다고. 유난히 맑은 물빛답게 물맛 또한 맛있었다. 정자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시던 중년부부가 "○○수예요. 그 맛이 나더라고요"


김녕으로 가는 골목골목 돌담으로 영역이 구분된 예쁜 집과 밭이 많았다. 골목길 담벼락 그늘에 앉으신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여기가 우리 집이라"  알려주신 분들의 집안을 기웃거렸다. 담을 넘어 훔쳐보거나 지나가며 스스로 보여주었거나 허락을 얻어 보는 집에는 대부분 마당 가운데 작은 정원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어딜 가나 넓디넓은 오지랖은 멈추지 않는다. 낮은 돌담 안으로 쓰러진 듯 누운 듯 마른 초록색으로 가득한 양파가 보였다. 대부분 인기척이라곤 없는 밭이었는데 약을 치는 어르신과 약치는 어르신을 마냥 쳐다보고 계신 어르신이 눈에 들어왔다. 궁금한 건 여쭤보고 가야 '나'인 거지.

처음 알았다. 지금 거둬들이고 있는 양파는 저장용이며 망에 넣어 바람길 좋고 서늘한 곳에 두면 내년 이맘때까지 두고 먹어도 될 거라 하셨다. 4만 평 가까운 양파농사를 지으신다며 갈수록 힘이 든다고도 하셨다. 일손 얘기를 하다가 일당에 대해 듣고는

어르신! 돈 떨어지면 여기 올 테니 얼굴 잘 봐두셨다가 써주시소

했더니, 아예 생각 말라고 손사래까지 치셨다. 일 안 해본 사람은 힘들어서 못한다고, 못할 거다도 아니고 못한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마음이 전혀 없었으면서도 어르신의 말씀에 안도를 해버렸다. 그래 이 일은 하고 싶어도 시켜주시지 않으니 못한다 못해, 대신 좋아하고 잘하는 걸 해보지 뭐.


19코스 마무리는 김녕해안가 해초무더기에 발 담그기!

짭조름한 바닷물이 물집이 생긴 자리를 얼른 꾸덕하게 말려주기를.


눈보다 못한 카메라렌즈가 본 함덕해수욕장
서우봉 낙조는 얼마나 예쁠까
이 맑은 물에 발을 담근 내가 선녀가 아닐까?

#제주 #제주올레 19코스 #함덕바닷가 #서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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