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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사람 가탁이 Jun 02. 2023

어쩌면 정신이 나간 것일지도

#8 올레길 1코스 230601 하루종일 비

첫 번째 올레길, 올레 1코스를 새로운 가이드, 새로운 참여자들 또 새로운 장대비와 함께 출발했다.

제주 올레길 1코스는 제주시와 성산포시의 중간지점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일어날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현 위치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출발은 서귀포, 중간은 제주, 도착은 서귀포)

캠프에 새롭게 합류하는 인원이 7명 내일은 12명이라고 전해줬다. 혼자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외모만 보면 40대 이상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60대와 70대 부부참여자도 의외로 많아서 놀랐다. 아무래도 훌훌 털고 올 수 있는 상황이 되려면 그 정도 나이는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이를 먹으면 많은 것이 여유로워지리라.


출발부터 비가 내렸다. 말미오름을 지나 알오름(오름을 올라서 보니 영락없이 알 모양이다)을 지나는 동안 비는 쏟아졌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아기자기한 종달리 마을을 지나가면서 따뜻한 조명이 드리워진 책방과 공방을 그냥 지나가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날씨가 허락하지 않았다. 종달리 마을은 며칠 전 가랑비와 함께  나간 하도리 마을(올레길 21코스) 다음으로 기회가 되면 다시 와보고 싶을 만큼 낮은 돌담과 지붕이 정다운 (지극히 제주스러운) 마을이었다.


정신없이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면 먹고 가입시더

부산에 산다는 여대장(모든 게 씩씩해서 붙여준 별명)의 목소리였다. 작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빗소리에 묻혀 버렸던지 한참을 불렀다고 했다. 벌겋게 약이 오른 해물라면과 감귤막걸리를 맛있게 먹고 우산으로 감당이 안될 만큼의 비를 피하려고 배낭에 싸매두었던 비 옷을 꺼내 입었다.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하게 내렸다.

맑은 날이었다면 성산일출봉을 올라갔을지도 모르지만 멀리서 어슴프레 외곽만 보였고

맑은 날이었다면 안중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성산터진목 유적지'의 잔혹사를 장대비 속에서 아프게 읽고 말았다.

그토록 많은 이들의 아픔이 뿌연 장대비로 내리는 건 아닌지...


어쩌면 정신이 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쏟아지는 빗속을 하염없이 걸으면서도, 빗물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버렸어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니까...

그래. 앞이 보이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되고 비가 그치고 앞이 보이면 다시 보면 될 일이다.


속옷까지 흠뻑 젖을 만큼 시원하게 비를 맞은 경험은 중학교 하교 때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건,

'피하기'를 포기하고 고스란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때론 '받아들임'으로 인해 모든 게 젖어들고 흘러가는가 보다.

알오름 언덕을 오르다.
장대비가 내리는 종달리 바다
희미하게 성산일출봉이 보이고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그토록 아픈 사실이 있다니!

#올레길 #1코스 #종달리 #4. 3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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