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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뚱그려 표현하는 것

<응답하라 1988>

by 재홍

'오다가 주웠다.'를 아시나요? 전통적인 경상도 남자의 고백법이자 선물 전달법, 사랑 표현법의 정석입니다. 무뚝뚝한 그들은 차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샀어"라고 다정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얼굴이 벌게진 채로 선물 상자나 꽃다발을 내밀며 "별 건 아닌데, 니 해라"라고 툭 내뱉는 모습이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오다가 주운' DNA가 혈관 속에 흐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색한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마치 삐끗 대는 로봇처럼 움직이거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 바로 서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입니다. 막상 대화를 할라치면 말을 더듬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곤 하죠. 사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구멍에서 삐져나오려다 입안에서 맴도는 그 말들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헤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애정 표현은 정답이라기보다는 오답에 가깝습니다. 진심이 목까지 차올랐는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헷갈리기 짝이 없는 투박한 안부나 장난뿐이기도 합니다.


<응답하라 1988>의 김정환이 딱 그랬습니다. 덕선이를 좋아하면서도 늘 틱틱거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물쭈물하다 타이밍을 놓쳐버리곤 했죠. 버스 안에서 덕선이의 어깨를 지켜주면서도 애써 무심한 척 손을 거두는 모습, 최택이라는 둘도 없는 친구에게 고백을 양보하는 듯한 그 어색한 뒷모습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큰 진심을 읽어냈습니다.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안쓰러우면서도, 제 모습 같아 깊이 공감했습니다.


어떤 이들의 사랑은 동글동글하고, 때로는 마름모꼴로 깔끔하게 각져 있습니다. 모서리가 매끈하고 형태가 바로잡혀 있죠.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아, 저건 사랑이구나' 싶을 만큼 명확합니다. 숨김없이 내비치는 졸졸 흐르는 강 같습니다. 스케치북 속의 하트 모양을 경계선에 맞춰서 분홍색, 빨간색 같은 색깔로 정성껏 칠해놓은 것 같아요.


하지만 또 다른 사랑의 모양도 존재합니다. 이들의 사랑은 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는 완전한 원이 되었다가, 가로가 넓어져 타원형이 되고, 위를 잡고 늘려진 공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다림질을 한 듯 빳빳한 셔츠처럼 각이 잡혀 있다가도, 수영을 오래 해서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처럼 흐물흐물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려다 오히려 제 모양을 잃어버린 것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후자의 사랑을 응원하게 됩니다. <응답하라 1988>에서도 저는 단연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였거든요. 뭉뚱그려진 '김정환'의 사랑은 저를 비롯해서 비슷한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울림이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고 정형화되지 않은, 그래서 예측 불가능한 형태가 어쩌면 사랑의 속성 중 하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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