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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기 시작하고부터는
시든 채로 두는 것

영화 <결혼 이야기>

by 재홍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충분히 차고 넘치게 들었습니다. 내 사랑은 다를 것 같았어요. 내 꽃은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여름만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차가운 눈이 올 줄 몰랐습니다.


<결혼 이야기>에는 이혼을 위해 고민하는 커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랑했지만 이젠 헤어져야 할 때임을 알고 있죠. 평화롭게 흘러갈 것만 같던 이혼은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난항을 겪습니다. '니콜'과 '찰리'는 대신 싸워줄 용병인 변호사를 선임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어서 알고 있던 서로의 약점을 파고듭니다. 법정에서 서로가 고용한 변호사들에 의해 폐부를 난도질당합니다. 그들은 한숨을 쉬고 손톱을 깨물고 다리를 떱니다.


영화는 그들이 집에서 싸우는 모습으로 절정에 도달합니다. 작은 섭섭함을 토로하던 그들은 싸움이 커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마치 불이 붙어 화르르 타오르는 사랑처럼, 그들은 서로를 죽여 없애야만 하는 무사처럼 칼을 쥡니다. '어떻게 말하면 이 사람이 최대한 상처받을까?'라는 질문이 머금어진 칼날을 가지고 있죠. 가장 예리한 것으로 골라 상대에게 던집니다. 정확하게 맞추지 않아도 됩니다. 단어와 문장은 정통으로 맞지 않아도 아프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내뱉는 '찰리'는 그만 소리 내어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지 이제 깨달은 것입니다. 칼을 잡고 있는 손에 피가, 그리고 '니콜'이 흘리고 있는 피가 보인 것이죠. 무릎을 껴안고 울고 있는 그를 '니콜'이 껴안습니다.

시간이 흘러 니콜은 다른 남자친구를 만나고, '헨리'와 핼러윈 파티에서 그들을 만납니다. '찰리'는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했던, '니콜'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적은 종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둘은 소리 없이 웁니다.


사랑은 비가역적입니다. 모든 식물이 그렇듯 사랑도 메말라가기 시작합니다. 피어나는 꽃봉오리, 튼튼히 자라나던 줄기, 파랗던 이파리를 기억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물도 더 많이 줘보고, 자리를 옮겨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식물의 사망 선고와 같은,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할 수밖에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니콜'은 '찰리'의 풀린 신발끈을 묶어줍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옛 연인에 대한 연민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찰리'와 '니콜'의 관계의 정리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가장 사랑했지만 지독하게 싸웠던 이가 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신발끈을 고쳐 묶어주는 것. 아이러니했습니다.


마치 영화 속 니콜과 찰리처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시들어가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고 있으면 고통만 깊어질 뿐이라는 것을요.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시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니콜이 찰리의 신발끈을 묶어주며 그들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듯, 우리도 사랑에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할 때가 옵니다. 겨울이 옵니다. 시들어버릴까 두려워 안절부절못했던 사랑 앞에서 그저 그 과정을 묵묵히 지켜봅니다. 그리고 다음 계절이 오듯 미움마저도 희미해지는 그 시간을 기다릴 뿐입니다. 차갑지만 결국은 지나갈 겨울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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