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기자의 사명, 이익, 명성?
한 사내가 카메라를 들고 군인 뒤를 따라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다가 그만 지뢰를 밟고 말았다. 그는 애석하게도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이 광경을 뒤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1954년 5월 25일이다. 그녀는 이후에도 어떤 죽음에도 떨지 않고 냉전시대 공산주의 독재국가 소련을 취재하고, 1961년 콩고 내전, 1963년 호치민군과 프랑스군이 싸우는 월남전을 취재했다. 이 취재 경험을 토대로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통킹만 사건(1964.8.2, 8.4)을 일으켜 월남전에 본격 개입했다. 그녀는 1965년 월남전 상황을 취재하다 풍토병(리슈마니어증)에 걸려 미국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1966년 1월 3일 45세로 사망했다. 그녀는 바로 6.25 전쟁을 취재한 미국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9.3~1966.1.3)이다. 사내가 지뢰를 밟고 사망한 지 7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다.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그녀는 여성의 몸으로 죽음의 순간을 넘나들며 전쟁터를 누볐다. 그러다 전쟁터 풍토병으로 결국 생을 마감했다. 언제나 불사조 같던 그녀는 죽음의 전쟁터에서 무엇을 보고자 했고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널리 알려진 전쟁보도의 신화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마거리트 히긴스가 지켜보는 앞에서 지뢰를 밟고 사망한 전쟁보도전문기자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0.22~1954.5.25)이다. 로버트 카파(본명 앙드레 프리드먼)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1년 정치적인 박해와 반유대주의를 피해 베를린으로 피신한 앙드레 프리드먼은 그곳에서 사진 에이전시 데포트의 암실 조수로 취직하면서 사진기자의 길로 접어든다. 이때부터 앙드레 프리드먼 대신 로버트 카파라는 미국식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사진가 카파는 레닌과 권력투쟁을 벌인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의 마지막 대중연설,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공화군 병사의 모습,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사진, 프랑스가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독일군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프랑스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사진 등 이른바 포토저널리즘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자기희생과 위험을 무릅쓴 취재 정신을 뜻하는 '카파이즘'도 그의 사진 속에서 태어났다. 동시에 카파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들의 권익과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역시 위대한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침 시모어 등과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을 설립했고, 잠시 경영을 맡기도 했다.
카파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은 ‘군인들의 뒷모습(아래 사진)‘이었다. 월남의 호찌민과 프랑스 군과의 전투였다. 월남의 남딘 마을에서 타이빈을 향해 걸어가는 프랑스 군인들의 뒷모습이 카파의 사진기가 본 마지막 장면이다. 카파는 왼손에 카메라를 쥐고 군인의 뒷모습에 정신을 팔다가 지뢰를 밟고 폭발하고 만 것이다. 갓 마흔 살을 넘긴 나이, 불꽃같은 삶이었다. 카파는 전쟁터의 카메라를 든 구경꾼, 위대한 사진가,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 무엇이었을까, 어디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을까?
1624년(인조 2년) 1월 24일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 장군은 북방 국경을 지키던 병사 1만 2천여 명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서 선봉에 섰던 그가 거꾸로 인조를 향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항왜 100명을 선봉으로 삼은 이괄의 반란군은 관군을 파죽지세로 물리치며 한양으로 진격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양군을 인조 대신 임금으로 추대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1623.4.11)이 일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때다. 경복궁을 차지한 이괄 군사는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무악산(안산)을 점령한 관군이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공격을 하기로 한다. 관군이 소수라고 얕본 이괄은 한양 백성들에게 성벽에 올라가 이 전쟁을 구경하라고 호기롭게 알린다. 이괄의 반란군과 관군이 맞붙은 무악재 전투가 한양 백성의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백성들은 전투를 구경하다 이괄의 군대가 불리하게 되자 서대문을 걸어 잠가 숭례문(남대문)으로 패퇴하게 만들어 관군을 돕고 결국 정충신 장군이 이끄는 관군이 승리하게 된다. 이괄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여 경기도 광주로 퇴각했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그들 손에 아들과 함께 살해된다. 전쟁에 구경꾼을 끌어들여 멋진 승리의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이괄의 계획은 도리어 구경꾼이 관군에게 합세하는 형국을 만들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2014년 7월 개봉된 영화 '명량'을 보면 백성들이 산 위에 올라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응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 남편, 아들들이 왜군과 싸우는 장면은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절체절명의 사건이다. 영화에서 백성들이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왜군과 심정적으로 싸우는 장면이 실감 나게 그려지고 있다. 이기고 지는 스포츠에서도 자기편 승리를 위한 함성이 드높은데 국민이 죽고 사는 문제, 나라가 망하느냐 유지되느냐 하는 전쟁을 바라보는 심정, 응원을 보내는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전쟁이 나의 전쟁이냐, 그들의 전쟁이냐에 따라 전쟁을 바라보는 심정과 응원의 정도가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인류 최초의 종군기자는 런던타임스(London Times)의 헨리 크래브 로빈슨(Henry Crabb Robinson)이다. 그는 1807년 나폴레옹의 이태리 원정을 취재했다. 하지만 근대 전쟁보도의 위력을 보여준 기자는 런던타임스의 하워드 러셀(William Howard Russell)이다. 그는 크림전쟁에서 5만 6천여 명의 병사가 콜레라, 이질,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된 병원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시체들이 살아있는 사람과 나란히 누워있었는데, 이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정경이었다. 병원에는 가장 평범한 물품조차 턱없이 부족하였다. 위생 내지는 품위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악취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환자를 환자가 그리고 죽은 사람을 죽은 사람이 돌보고 있는 듯 보였다."
이 보도로 나이팅게일(Floren Nightingale)이 병원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고. 여론이 더 악화되어 1855년 에버딘(Aberden) 정부가 몰락했다. 한편, 러셀은 살해위협을 받고 간첩죄에 몰리기도 했다.
피터 그레그 아넷(Peter Gregg Arnett, 1934.11.13~ )은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미국 언론인이다. 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월남에서 주로 AP통신 기자로 활동했고 1966년 퓰리처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특히, 1991년 걸프전 당시 CNN 기자로 바그다드에 남아 미군의 바그다드 공습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덩달아 신생 언론사이던 CNN도 세계적인 뉴스언론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04년 미국 저널리즘 스쿨 연수 때 잠시 들른 미국 애틀랜타 시티의 CNN은 1980년 설립된 뉴스전문채널로 기존 방송이 1시간 또는 30분 단위로 정규뉴스 방송 시스템을 운영하던 것을 24시간 뉴스시스템으로 바꿨는데 이런 시스템 덕분에 걸프전을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송출할 수 있었다.
미디어가 단순히 구경꾼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국가와 정부의 정책을 바꾸고, 군인들의 처우개선과 인권의 문제를 여론으로 환기시켜 전쟁을 이유로 매몰되거나 은폐, 또는 간과되는 문제를 들춰내 개선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디어가 전쟁터로 달려가고 기자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데는 앞서 언급한 이유 말고도 또 있다. CNN 사례에서도 발견되고 미군이 그토록 찾아 죽이고 싶어 했던 오사마 빈라덴을 미국 기자인 피터 아넷이 인터뷰하여 그의 말을 세상에 내보는 사례에서도 발견된다. 상업 미디어와 기자에게는 이와 다른 무엇이 있다. 언론사의 상업적 이익과 기자의 명성 쌓기가 어른거린다. 전쟁과 미디어 관계가 복잡 미묘하다. 미디어를 지배하는 권력관계, 이해관계가 기자와 보도기사의 방향을 틀어쥐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