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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un 04. 2021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

 가방을 고르면서 아들이 말했다.

 “엄마 가방을 왜 사야 해요? 집에도 가방이 두 개나 있는데.”

새 가방을 사는 것이 소망이었던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외동아들이라 아들은 새 것을 사달라고 조르는 일이 없었다. 크레파스도 옷도 장난감도 아들은 사촌들에게 물려받아 사용하는 것이 많았다. 아들은 그래도 속상해하거나 새것으로 사달라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있는 장난감도 책도 모두 혼자 사용하는 것이니 빼앗기거나 사라질 일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 아빠의 사랑도 혼자 받아왔고, 유아용품들도 대부분 새로 사야 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새 물건들은 익숙하고, 귀할 것이 없는 물건이다. 오히려 좋아하는 사촌 형의 이름이 적힌 크레파스나 책을 더 좋아했다.

 8살, 아들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학부모가 되었다. 유치원과 달리 학교는 공부도 어렵고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사촌 형의 말에 아들은 초등학생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입학식에 가지 않으면 초등학생이 안 되는 거냐는 말에 나는 웃음이 났다. 입학식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많은 아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다.) 입학식을 떠올렸다.     


 6남매 중 다섯째, 딸 셋을 낳고 기다리던 아들을 낳은 뒤라 나는 계획에 없던 아이였다. 또 아들일 거라는 기대로 태어난 나는 딸이었다. 엄마는 속상해서 내가 태어난 후로 한동안 밤마다 우셨다고 했다. 남동생을 낳고 나서야 엄마의 눈물은 조금이나마 위로받게 되었다고 했다. 넷째 딸 환영받지 못한 나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2살 많은 오빠는 항상 나를 모과(사투리로 '모개'라고 놀렸다.)라고 놀렸다. 못생겼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할머니부터 어른들이 나를 미워해서 생긴 별명인지, 모과라고 부르다 보니 더 미워지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름보다 모과로 많이 불렸다.

 나는 이 별명이 정말 싫었다. 내가 싫어할수록 우리 가족에게 이 별명이 재미가 되어 동네에서도 공식적인 별명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나를 모과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우리 가족이 나를 모과라고 불러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 것이다.

 나를 모과라고 부른 것은 엄청난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별명이 나에게 엄청난 상처가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아프게 할지 모르고 했던 우스갯소리였을 것이다. 어른들이 나를 모과라고 부를 때 장난스럽게 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나를 싫어하던 할머니와 집안 분위기 탓에 나는 모과라는 별명이 가시처럼 느껴졌다.      


 내가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새 가방, 새 옷이 없이 새 공책과 새 연필로 입학 준비를 했다. 우리 엄마가 나를 특별히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 집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로 언니가 셋이나 있어서 물려받을 것이 많았다. 나는 항상 새것이 갖고 싶었다. 입학식이라도 새것으로 갖고 싶다고 엄마한테 말하기 어려웠다. 엄마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그럼에도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들과 오빠들의 입학식도 대부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식이 다가오자 우리 가족은 새로운 놀림거리가 생겼다. 못생긴 아이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고 식구 중 누군가 장난을 쳤고, 어느새 가족들이 심심할 때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못생긴 아이, 모과이므로 학교에서 입학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 나였다. 나는 정말 학교에 가기에 부족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불안감을 읽은 것인지 장난 많은 오빠는 더 자주 얄밉게 나를 놀렸다. 나는 학교에 입학하기 싫다고 생각했다. 입학하기도 전에 예쁜 아이만 좋아하는 학교에서 매일 놀림받기 싫었다. 아니, 입학을 거부당하느니 아예 학교에 가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학교가 무조건 싫었던 건 아니다. 언니들에게 자연스럽게 글자도 익히고 숫자도 익혔다. 언니들이 들려주는 학교 이야기에 사실 나는 항상 학교가 궁금했고, 빨리 입학하고 싶었다. 못생긴 아이가 입학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매일 학교 가고 싶다고 조르던 나였다. 간절히 바랐던 만큼 입학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어느새 3월 2일 입학식 날이 되었다. 언니에게 물려받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나는 식구들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식구들보다 빨리 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정말 내가 입학이 안 되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슬픈 소식을 식구들과 함께 들어서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기 전에 내가 먼저 확인할 생각이었다.

 내가 입학할 학교는 집에서 걸어서 40분 거리에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큰길로 쭉 아래로 가다 보면 길가에 세워진 학교가 보였다. 버스가 하루 세 번 다니는 동네라 언니들도 오빠도 매일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가끔 시장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오다 보면 학교가 보여서 나는 창문으로 학교 운동장과 그네를 보며 학교 갈 날을 기다리곤 했다. 시골 동네라 그네는 학교 놀이터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까 선생님이 무섭게 집으로 가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학교였다. 길에서 조금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커다란 쇠로 된 학교 정문이 보였다.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짧은 오르막을 올랐다. 커다란 학교 정문 옆에 기둥이 있고, 다시 작은 쇠문이 열려 있었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기가 두려웠던 나는 기둥 옆 작은 문으로 학교 안을 엿보기 시작했다. 입학식이 시작하기에 이른 시간이라 운동장에 사람은 많이 없었다. 나처럼 서둘러 학교에 온 입학생과 학부모, 입학식을 준비하느라 교단에 마이크롤 설치하는 선생님이 보였다. 나는 그 좁은 문조차도 들어서기가 두려웠다. 기둥 옆 오르막길을 따라 꾸며진 화단 난간에 앉았다. 나는 앉아서 학교 안을 들여다보며 들어가야 할지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입학식을 하는 아이들과 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하나둘 위풍당당하게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나는 화단 난간에 앉아서 지켜봤다. 나는 왜 모과일까, 왜 나는 저 문을 들어가지 못할까 나는 점점 기둥 옆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내 몸이 보이지 않게 점점 작게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선희야 여기서 뭐해? 왜 안 들어가고 있어?”

엄마 목소리였다. 엄마와 언니들과 오빠가 함께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입학한다고 좋아서 일찍 간 줄 알았더니 왜 아직 안 들어가고 여기 있어?”

엄마의 이어지는 물음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웅크리고 앉은 내 손을 잡았다.

 “자 들어가자, 입학식 시작하겠다.”

내 손을 잡은 엄마의 손은 따뜻했고, 부드러운 엄마 목소리는 내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 손을 잡고도 망설였다.

 “왜? 들어가기 싫어서 그래?”

엄마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난 못생겨서 입학 안 시켜주면 어떡해?”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말에 엄마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너 그래서 여기 이러고 있었던 거야? 너 놀리려고 한 말이야. 못생긴 아이도 입학할 수 있어. 그리고 넌 못생긴 아이가 아니야. 네가 얼마나 예쁜데.”

나는 놀랐다. 못생겨서 입학할 수 없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내가 못생기지 않았다는 말에 놀랐다. 무엇보다 내가 예쁘다고 한 엄마의 말에 나는 정말 놀랐다. 평소에 말이 없기도 했지만 엄마는 표현을 잘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못생겼다고도 예쁘다고도 사랑한다는 말도 잘하지 않았다.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그러니까 어서 들어가자.”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당당하게 학교 정문으로 들어갔다. 입학식을 하는 동안 엄마는 뒤에서 나를 보고 계셨다. 나는 이따금씩 엄마를 돌아봤다. 엄마는 내게 손짓으로 앞을 보라고 하면서 웃었다.

 그렇게 나는 입학을 했고, 1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로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 나의 입학식은 오빠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못생겨서 입학 못할까 봐 학교 앞에서 앉아있던 나를 오빠는 내내 놀려먹었다.   

   

 아들의 입학식 날이 되었다. 새 가방도 새 옷도, 새 연필과 필통도 바라지 않는 아들은 집에 있는 물건들을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난 아들에게 새 가방과 새 옷, 새 연필과 필통까지 모두 사주었다. 내 아픈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보상이었다. 내 아들에게 사주지만 나의 8살에게 사주는 입학 선물이었다.         

 입학식 날 아침, 아들의 손을 잡고 나는 당당하게 학교 정문을 들어갔다. 커다란 학교 정문이 이제 두렵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나는 아들에게 매일 예쁘다고 멋지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못생긴 아이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아들은 결코 자신을 못생긴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입학식을 하는 동안 아들은 의젓했다. 함께 유치원에 다니던 친구가 같은 반이 된 것이 좋아서 친구의 손을 잡고 웃기도 했다. 학부모가 되어 뒤에서 바라보는 아들의 뒷모습에 나는 뿌듯하고 괜히 뭉클해졌다.     

아들의 커가는 모든 과정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본다. 내가 기쁘고 슬프던 순간들까지 모두 아들에게서 찾아내고 나는 기쁘고 아프다. 동시에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상처와 아픔이 아들로 인해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하고, 아들의 볼에 뽀뽀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커다란 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갈 힘찬 아들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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