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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Apr 03. 2024

기억하지 않는 죽음

 "선생님 아빠랑 무슨 얘기를 하신 거예요? 어쩌면 그날 아빠의 자살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은주는 다시 기영에 대해 물었다. 여전히 혜영과 기영의 자살이 관계가 있을 거라는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혜영은 맥주를 길게 마셨다. 미지근하게 식은 맥주는 쓴맛이 났다. 혜영은 은주에게 해줄 말이 없는 것이 미안했다.

 "은주야 다른 건 몰라도 아빠가 너를 사랑했다는 건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어.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야."

 "그럼 뭐해요. 옆에 없는데. 사랑하면 옆에 오래 있어줘야죠. 다른 죽음도 아니고 자살한 사람이 남은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사랑을 말하기도 해. 살아있다고 그게 꼭 사랑은 아니니까. 살아있는 것보다 더 큰 부성애로 떠났다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그런 게 어딨어요. 자살이 부성애라니. 교통사고나 아픈 거였다면 몰라도 자살은 아니지 않아요?"

 은주는 마치 기영이 앞에 있는 것처럼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면 오래 있어줘야 한다는 은주의 말에 혜영은 동호를 생각했다. 은주의 말대로 사랑이 오래 옆에 있어주는 것이라면 동호도 혜영과 소영을 사랑하지 않았다.

 "차라리 아빠가 나쁜 아빠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아빠를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살 수 있잖아요. 선생님 저는요 매일 아빠가 보고 싶어요. 그리고 매일 아빠가 미워요."

 은주는 건조하게 말했다. 그리고 맥주 하나를 다시 따서 마셨다. 밤이 깊어서 세상이 고요했다. 이따금씩 달리는 자동차가 커튼에 옅은 불빛을 쏘고 지나갔다. 캔에 남은 맥주를 다 마시고 은주가 일어나 술을 더 사겠다며 나갔다. 은주가 나가자 방안이 무서울 만큼 조용했다. 마치 이 큰 모텔에 혜영만 있는 것 같았다. 코로나가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빠르게 귀가시킨 것일까. 혜영은 코로나가 있기 전에도 모텔이 이렇게 조용했을까 생각해 봤다. 코로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집으로 보냈다. 사람들의 동선이 추적되니까 아마도 불륜커플들은 조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혜영은 생각했다. 동호나 기영은 좋은 시절에 바람을 피운 운 좋은 사람들이라는 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은주가 들어왔다. 봉지에서 맥주를 꺼내 혜영에게 주고 자기도 마셨다. 혜영은 자기가 이렇게 많은 맥주를 마신 지가 얼마만인지 생각해 봤다. 아프기 전에도 혜영은 매일 한두 캔을 마시고 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빈 맥주캔이 바닥에 쌓였다. 두 사람은 조용히 창밖을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차들도 지나가지 않을 만큼 새벽이 깊어가고 있었다.


 창밖이 서서히 밝아오는 것을 혜영은 말없이 지켜봤다. 새벽에 컵라면 하나를 먹은 은주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7년 전 혜영이 전화를 했을 때 기영은 단순히 학부모 상담 정도로 생각하고 카페로 나왔다. 상담을 카페에서 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래서 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기영은 혜영을 만났다. 혜영이 먼저 와서 커피를 마시면서 기영을 기다렸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기영은 은주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혜영은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소영의 이름을 불러본 것이 너무 오래된 일이라 혜영은 그 이름을 부르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했다. 더군다나 한때 불륜이었던 기영 앞에서 소영을 말하는 것이 불편하고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소영에 대해 기영에게 듣고 싶었다. 소영의 짧은 삶을 혜영이라도 더 많이 기억하고 싶었다. 어쩌면 소영에게는 첫사랑이었을 사람, 기영과의 만남을 혜영은 알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입에서 맴돌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혹시 많이 안 좋은 일인가요? 은주가 학교에서 크게 나쁜 짓을 한 건가요?"

 기영이 불안한 목소리로 재촉하듯 물었다.

 "황소영 아시죠?"

 "네?"

 "황소영이요. 기억하시죠?"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언니예요. 황소영이 내 언니예요."

 "아. 무슨 이런 일이."

 "은주 아버님, 아니 박기영 씨 우리 언니랑 어떤 사이였는지 알고 있어요. 언니한테 들었어요."

 "아 그게 옛날일이라. 소영 씨는 잘 지내고 있나요?"

 소영의 안부를 묻는 기영의 말을 듣자 혜영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영은 죽은 소영의 소식을 물었다. 소영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경찰에서 한 달 전에 헤어진 기영에게 참고인 조사를 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런데 마치 모르고 있다는 듯이 안부를 묻는 기영은 소영이 죽었다는 것을 잊었거나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혜영은 생각했다. 소영을 죽인 범인을 끝내 잡지 못했다. 지환이 마지막까지 소영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 조사를 받았지만 소영과 CCTV에 잡히고 빌라에서 혼자 나온 시간이 너무 짧아 범인으로 단정 짓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살해동기가 없었다. 경찰은 한 달 전까지 만났던 기영을 만나서 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CCTV에도 잡히지 않았고, 휴대폰 위치가 은행으로 나와서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기영은 용의 선상에 제외했다. 소영은 죽었지만 용의자도 범인도 찾지 못한 채 7년이 흘렀다. 혜영은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이듯 기영에게 해야만 할 말이 생각났다.

 "박기영 씨 우리 언니 왜 죽였어요?"

 "네? 무 무슨. 난 그날 그 집에 가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헤어졌고 그 후로 만난 적도 없어요."

 "아까는 언니의 안부를 묻더니 이제는 언니가 죽었다고 하는데도 놀라지도 않네요. 그날 박기영 씨가 그 집에 갔다는 거 알고 있어요."

 "증거가 있다면 경찰이 나를 찾아왔겠죠. 경찰이 나를 체포하지 않은 것만 봐도 내가 범인일리가 없잖아요. 아까는 순간적으로 소영이 죽었다는 것을 까먹은 거예요. 그래요. 그럴 수 있잖아요."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까먹는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경찰조사까지 받았는데. 박기영 씨를 은주의 학부모로 만났을 때부터 나는 언니의 유품들을 다시 꺼내봤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어요. 그래서 오늘 만나자고 한 거예요."

 "무슨 증거를 찾았다는 말인가요? 분명 그때 경찰은 증거도 증인도 없다고 했는데."

 "이제 기억이 다 났나요? 나는 이 증거를 경찰서에 가지고 갈 생각이 없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박기영 씨의 구속이 아니니까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을 뿐이에요. 박기영 씨가 구속된다고 언니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날 언니를 왜 죽였는지 말해줘요."

 기영은 혜영의 말에 대답을 망설였다.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혜영이 자신을 속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말했다가 뒷감당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혜영이 정말 자신을 신고할 마음이 없다면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기영은 갑자기 소영의 목을 누를 때의 손에 감촉이 생각나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영의 목을 누를 때 손에 전해지던 목의 부드러운 촉감과 진한 라벤더향 비누냄새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기영은 눈을 감고 죽음의 순간에 바라보던 소영의 눈빛을 뿌리치기 위해 애썼다. 자신도 모르게 그 눈빛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것이 기영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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