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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a Jan 01. 2021

살기 좋은 세상인가?

아이 낳기가 고민되는 두 번째 이유

이번 글을 쓰면서 여러 번 무릎을 쳤는데, 아이 낳기를 고민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내 힘들었던 20대 경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아이 낳기를 고민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 “경력 단절되면 어떡해.”라는 말 바로 다음으로 나오는 말은 “지금 세상이 살아가기에 너무 힘든 세상인 거 같아.”라는 말이다. “왜 나는 세상을 그렇게 느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번 글을 쓰며 답을 얻었다.


결혼과 맞물려 지난 2년 동안 내 삶이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너무 안정적이어서 힘들었던 시절을 잊고 있었는데, 그 시절 나는 ‘생존’의 위협을 느꼈었다. 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에 내 몫의 자리를 만드는 것에 생존 위협을 느꼈다. 그때의 힘든 시절이 지금의 평범한 삶을 이끌었듯, 나의 아이도 평범하게 살기 위해 무조건 겪어야 할 일들인데 나는 그것이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아이 낳기를 고민했다.


각자도생의 경쟁사회

“나는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태어나지 않음을 선택하고 싶었어.” 남편과 술 한 잔 하다 나왔던 이야기다.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삶이 너무 피로하다는 생각에 가끔 태어나지 않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모든 날이 힘들었던 것도 아니고, 힘든 일도 지나고 보면 해프닝 정도로만 기억되듯, 한 번은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다 등의 이야기를 할 수야 있겠지만 너무 피로했다. 지금처럼 여유가 생기고 집에 와서 핸드폰을 하느라 무료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건 이직과 결혼 등이 맞물려 겨우 2년 정도 된 것 같다.


내 몫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브런치에 ‘떨어질 기회라도 있던 시대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던 적이 있는데, 취업 준비를 하며 나는 빨리 늙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은 죽고 싶었다는 말과 같음을 이제는 안다.)


2014년부터 시작된 취업준비는 막막했다. 자소서, 면접, 자기소개. 지금 돌이켜 보면, 대학교를 막 졸업한 사람이 자신을 뭐라고 소개할 수 있었을까? 싶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 어떻게 열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 당시 취업정보 카페에서는, 너무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줘도 금세 이직을 할 것이라는 시그널을 줄 수 있어 떨어질 것이라 했다. 적당히 열정 있고, 적당히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격한다는데 나는 그 적정선을 알 수가 없었다.


한 회사에 지원했을 때는, 면접장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영어면접이 추가됐다고 했다. 앞 타임 면접자가 3개 국어 능통자여서 이제는 그 사람보다 영어를 잘해야 붙을 수 있다고 했다. 국내 기업 MD 자리라, 전혀 영어를 쓸 일도 없던 자리였고, 면접전형에 대한 안내에는 영어면접이라는 말도 없었다. 그 시절은 스크리닝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무엇이든 급작스럽게 추가되던 시절이었다. 사실 내가 영어를 잘한 들 붙을 수 있는 것이 명확한 것도 아니었다. 내 뒷타임 면접자가 나보다 무엇 하나 뛰어나다면 나는 대체될 뿐이었다. 그런 불합리함에도, 나는 내 자리를 얻기 위해,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해야만 했다. I want to work in here.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올데이 면접이라고 그럴싸한 이름이 붙었는데, 회사 건물 7층에서 백여 명 가까운 면접자들이 1차 면접을 보고 나서 갑자기 면접자 모두를 1층 로비로 내려보냈다. 그러더니 앞으로 문자를 받게 될 텐데, 합격 문자를 받은 사람만 다시 7층으로 올라올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1층 로비에 몰려있던 사람들 중 선택받은 몇 명은 엘리베이터로, 나머지 몇십 명은 출구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외국계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토록 원하던 논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회사에 입사하였으나, 그만큼 결과로 평가받는 회사였다. 입사하고 2주 뒤 어떤 미팅에서 정말 무슨 말인지 몰라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 매니저가 앞으로 말하지 않을 거라면 미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곳은 강한 놈은 알아서 살아남는 것처럼, 연수도 설명도 없이 그저 던져졌고 그저 평가됐다. 그렇게 3년을 그곳에서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12시에 전체 건물이 소등되면, 동기들과 함께 자연스레 다시 불을 켜고 노트북 앞에 앉았고, 목디스크 허리디스크에 다들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이 자세가 더 일하기 편하다느니 농담을 하며 버텼다. 매일 있는 미팅은 오늘의 내가 얼마나 논리적이고 똑똑한지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이런 생활이 버거워 잠시 쉬고 싶었지만, 나는 잠깐의 쉼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 그때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남아있는 긴 세월이 너무 버겁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벌어야 할 돈들이 너무 크게 와 닿아서 얼른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스트레스로 손이 떨리지도 않고, 출근 준비하는 화장대 앞에서 '오늘만 버티자'라고 나를 다독일 필요도 없고, 잠시 쉬었던 시간에 대해서 그때 왜 쉬었느냐고 면접관들에게 질문공세를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다시 흘러, 이제는 그때 고생했던 시절, 삽질들이 자양분이 되어 내 밥벌이를 수월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씁쓸할 뿐이다. 이렇게 힘들어야만, 그리고 매일을 전력 질주해야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지금에 대해. 그리고 내가 지금 밥벌이를 잘하고 있다고 해서, 앞으로의 평온한 삶이 절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아이가 나와 같은 20대를 겪지 않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겪었고, 지금은 6살 터울 나는 내 동생이 겪고 있는 이 사회의 각박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 이겨내고 나면 살만해진다 라고 말해줘야 하나? 겉으로 보면 나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은 사람처럼 보인다. 이제는 취업 준비할 때 겪었던 어려움, 서울에 자리 잡기 위해 걸렸던 10년의 시간들이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산다는 것이 녹록지 않음을, 차라리 내가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태어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이 나았고, 이미 태어난 이상 각자도생의 사회에 스스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해버렸다. 나를 채찍질하며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누군가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스스로 이겨내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그 사람이 재기할 사다리조차 마련해주지 않았다. 내가 이제야 마음이 여유로워졌다고 아이를 낳는 것이 맞을까.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태어날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10년 정도 죽을 듯 노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안다. 다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지만 운이 따르지 않아 여전히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음을 안다.


오늘도 흉악범죄 뉴스가 들린다.

아이가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경쟁사회에 노출되는 것과 별개로,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사건, 사고들은 또 너무 자주 발생한다.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운’이 되어버린 사회. 그리고 이것이 단죄되지 않는 사회. 아이에게 호루라기를 쥐어주고 낯선 아저씨가 말을 걸면 도망치라고 가르치는 것 말고 무엇을 해줄 수 있나.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최근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며, 나의 태도에 대해 크게 반성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라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반대로 사회가 자격이 있으면 상으로 아이를 줄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그렇게 상과 벌로 감히 이야기할 존재가 아니며, 나의 그런 생각들이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생각이라고 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나의 아이를 위한다는 말이, 이미 태어나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례한 생각이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 험한 세상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 태어난 아이들 그리고 태어날 아이들이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고 했다. 사실 내 목소리로 어떻게 이런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 아직은 전혀 모르겠다. 그러나 김소영 작가님 덕분에 생각의 방향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객관화하여 글을 쓰는 것부터가 출발일지도 모르겠다.


내 몫의 삶을 살려면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경쟁사회.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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