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낳기가 고민되는 세 번째 이유
그리고 가장 마지막 이유는 지금의 완벽한 일상과 회사 바깥의 나에 대한 생각이다. 일은 어떻게든 계속할 수 있더라도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처럼 커피를 마시고, 내가 가진 생각을 글로 남기는 나는 사라지는 걸까? 이런 시간을 다시 가질 수는 있을까?
‘부모의 일상’은 없었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내고 있는 부모들이 쓴 글을 자주 찾아보고는 하는데, ‘육아’라는 큰 청크의 일을 추가하면서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이 ‘일상의 나’인 것 같았다. 출근하기 전에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는 것, 회사에서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하는 것, 친정어머니가 유치원 하원 시간부터 나의 퇴근 시간까지 아이를 봐주었기에 퇴근하면서 바통터치를 하는 것, 아이를 재운 후에는 밀린 설거지에 회사에서 다 끝내지 못한 업무를 하거나 다음날 아이의 유치원 준비물을 챙기며 다음날을 준비하는 것. 그 사이에서도 더 많은 시간 아이와 함께 해주지 못한 죄책감. 어디에도 ‘부모의 일상’은 없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치열하게’라는 단어가 와 닿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열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그 치열한 시간은 끝이 가늠되지 않았다. 힘들 때 이것의 끝이 있다고 생각이 들 때 조금이나마 참아볼 수가 있는데, 그들의 하루는 너무 길고 고단해 보여 끝이 가늠되지 않았다. 아이가 혼자 등하교도 할 수 있고 숙제도 할 수 있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버티면 된다? 1년 같은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자꾸 사회는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나를 포기하라고 한다. 이런 상황을 그런대로 유지는 하고 있는데, 내가 정말 일을 좋아해서 버티는 건지, 목적을 잊은 채 버티고 있는 건지 나는 잃어버린 채, 직장에서의 나, 엄마로서의 나만 남아있을 때.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플지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이라는 존재는 온전히 내 시간을 쏟아야만 한다.
요즘은 매체에서 ‘육아의 어려움’을 많이 조명하면서, 아이가 온전히 나의 시간을 먹고 자라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부모가 산후조리원을 퇴소하고 나면, 제일 첫 번째로 ‘인간적으로, 잠 좀 자고 싶다.’가 소원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아기는 위가 작아서 한 번에 많은 양의 우유를 먹지 못하기에, 2시간 단위로 잠을 깨 우유를 먹어야 한다. 아이가 그렇다고 우유를 몇 분 안에 먹는 것이 아니라, 우유를 먹는데도 40분은 넘게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가 잠든 시간은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우유병을 삶고, 밀린 빨래를 해야만 하는 시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건 아기가 태어난 직후에 겪을 이야기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아이가 유치원에 간다고 해서 나의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전 매체들에서 아이가 요람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모습도,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재롱을 부리는 것도 찰나의 순간이고, 그 순간들을 위해서는 나의 온전한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을 기준으로 완벽히 돌아가는 톱니바퀴
남편과 나는 그런대로 완벽히 굴러가는 톱니바퀴 일상을 만들었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는 퇴근 후 함께 월, 수, 금마다 수영을 다녀오고, 화, 목만 함께 저녁을 해 먹었다. 일주일에 함께 하는 6번의 식사에서 누가 요리를 할 것이고, 누가 어떤 집안일을 할 것인지 잘 정리되었다.
출근하기 전에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고, 집에 와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하는 시간이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꾸준히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지금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 인지하는 것. 평일에 퇴근하고 3시간, 빨래를 돌리기에는 애매한 이 시간이 나를 지탱하는 시간임을 안다.
이렇게 완벽하게 루틴화된 일상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을 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나는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일은 어떻게든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이 사라질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포기해야 한다면 나의 일상부터 포기해야 하는 걸까?
실제로 개인 시간을 잃어보기 전까지는 포기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었다. 작년 동생의 취업문제로, 우리 부부와 여동생이 몇 개월간 같이 지냈던 적이 있다. 구성원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그 톱니바퀴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둘이 가볍게 외식으로 대체했던 끼니였는데,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요리를 더 하게 되었고, 절대적으로 집안일에 들어가는 시간이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생이 서재방을 쓰게 되면서 퇴근하고 다이어리를 쓸 장소가 사라졌었다. 거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는, 오빠의 TV 보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TV 소리를 무시한 채로 다이어리를 쓰지도 못한 채, 불만족스러운 시간이 길어졌었다.
그때 나는 우울했고, 내가 그저 밥을 하고 돈을 버는 기계처럼 느껴졌었다. 하루에 채 3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에는 회사를 1시간 일찍 가서 업무 시작하기 전에 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하고, 물론 동생 역시 편하지만은 않았을 시간이었기에 독립하기로 하면서 해결되는 듯했다. 내가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고, 나를 잃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되면 가장 먼저 포기될 시간이라는 것 또한 알기에 그만큼 애틋했다.
그러다 나를 잃어버리면 어쩌지?
아이가 태어나고서는 ‘임시적으로’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톱니바퀴를 새로 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라는 존재는 우리의 온전한 시간을 먹고 자라는 존재고, 몇 년이 지나 나라는 존재가 아예 사라지고 돈을 버는 나와 엄마로서의 나만 남아있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한다. 엄마의 새해 목표가 내가 3살 무렵에는 ‘기술 배우기’ 였겠지만, 어느새 가족의 건강, 나의 대학 합격, 나의 결혼을 잘 치르는 것이 되었던 것처럼, 누구의 엄마로서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만 남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 또한 든다. 아이가 크고 나서는 과연 내가 지금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들. 그때 내가 스스로에게 지금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내면이 답할 것이 남아 있을지에 대한 고민들.
이런 내가 불편하다
처음에는 아이 낳는 것이 내가 매니지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 알아보자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낳기 어려운 이유 3가지를 내가 읽을 수 있는 글로 써놓고 보니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특히 이번 편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질문의 답을 쓰면서, 아이가 낳아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이를 낳으면 나를 잃을까가 고민이다 따위의 글을 쓰다 보니 태어날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이 낳기에 무엇이 고민인지 순서까지 나열하면서 말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왜 아이를 낳으려고 이런 글을 쓰고 있나 하는, 스스로에게 드는 불편한 감정. 아이는 그렇게 내가 여유롭다고, 세상이 살만하다고 상처럼 세상에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그런데 나중에 이것 하나는 약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혹 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질 때, 이것은 아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개인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라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런 글을 쓰는 내가 부모 자격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이가 온 후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정리될까? 나의 일상을 먼저 내려놓는 것이 부모가 되는 첫 번째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아이가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시기가 되었을 때까지 나를 잊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