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1남 2녀 중 둘째다. 위로 오빠, 아래로 여동생사이에 끼인 인생이었다. 막내는 투정하며 엄마아빠에게 요구하지만 자기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백화점에서 아빠가 옷을 사주셨는데 동생이 선택한 빨간 외투가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너무 비싸서 자기는 더 싼 걸 집어 들었다. 그리곤 집에 와서 속상해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자기는 늘 자신의 속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부모님이 힘드신 게 싫었다.
택배차 운전대를 잡고 가만히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홀로 외로웠을 어린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측은함에 가슴이 뭉클했다. 왜 몰랐을까. 결혼한 지 28년이나 됐는데 이런 아내의 속마음을 알게 된 것은 같이 택배를 하면서다. 이럴 때면 1톤 탑차 포리는 우리 부부의 정겨운 대화가 넘쳐나는 카페가 된다.
아내가 힘겨워하는 남편이 걱정된다며 택배초기에는 도시락을 꼭 챙겨 왔다. 눈부시게 화창한 날이나 가늘게 눈이 내리는 차창을 보며 잠시나마 휴식하며 식사를 할 땐 캠핑카 타고 나온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요즘 아내는 나를 놀려먹는 재미가 큰가 보다. 나를 놀리곤 멍한 내 모습에 한바탕 눈물을 글썽이며 웃는 모습을 보며 속 몰래 행복해지곤 한다.
사실 아내의 미소는 나의 전부다. 회사를 폐업시키는 날 제일 먼저 든 것이 이젠 아내의 얼굴에서 미소를 보지 못할 거란 절망이었다.
택배를 하러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나선 낯설고 힘든 환경에서도 나와 함께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서로 투탁거리고 다투기도 했지만 이젠 비정상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두운 새벽에 함께 일어나 준비하고 탑차에 몸을 싣고 출근하는데 남궁옥분의 재회가 듣고 싶어 틀었다. 어느새 함께 합창하면서 출근하는 길은 놀이터로 가는 길이 되었다.
나는 이젠 아내의 소유물과 놀림감으로 기꺼이 내어준다. 아내의 웃는 모습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는 내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안다. 시간이 가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우리는 부부다.
택배를 할 때 물량이 많이 나오고 배송하기 편한 지역을 '꿀구역'이라고 한다. 당연히 선호도가 높다. 하지만 경험 많은 택배기사들은 어느 정도 수입이 안정된 상황에서는 꿀구역보다 익숙해진 구역을 더 선호한다.
새로운 구역을 배송하기 위해선 숙지해야 할 것들이 많다. 차량을 움직여야 할 동선과 주차할 지점, 아파트 동별 출입구위치, 기타 배송제약조건 등등. 충분히 숙지되어야 신속한 배송이 가능해지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리고 고객정보도 축척되어야 상황별 다양한 고객요구에 대해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래서 경험을 해본 택배기사에게 좋은 구역이란? 많은 수입이 보장되는 꿀구역보다는 내게 익숙해진 구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