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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Jan 17. 2024

#책8.『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2023 다산책방

 아일랜드를 생각하면 슬픈 감정이 먼저 든다. 7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끝내 흡수되지 않고 독립을 이룬, 그러나 아일랜드섬 일부는 결국 영국에 빼앗겼다. 영국 감독이 만든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줄거리는 바람에 사라졌지만, 형제의 아픔은 아직도 간직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아일랜드의 독립에 바탕을 둔 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배경은 1985년 12월의 며칠이다. 백여 쪽의 짧은 단편이라 쉽게 생각했지만, 시작부터 무겁고 어렵다. 클레어 키건이 보여준 80년대의 아일랜드는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사람들을 할퀸다. 작가는 평범한 가장인 빌 펄롱의 일상에 권력이 숨겨놓은 무서운 세상을 던져놓았다. 작가는 이 평범한 가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 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의 가정은 사소하지만 행복하다. 그런 모습들이 세세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케이크 만드는 아일린, 산타 할아버지에게 카드를 쓰는 딸들, 그녀들을 바라보는 펄롱. 그의 집에서 아내와 딸들은 사랑스럽고 넉넉한 불빛이 있고 흥겨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과 즐거움이 가득하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지며 동전을 주거나 땔감이 없는 집에 땔감을 주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산다. 그런 그였으니 아무리 조용히 엎드려 지내려 했겠지만, 결국 석탄광에 가둬진 맨발의 소녀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를 구해서 집으로 가는 그는 생애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그 뒷이야기는 우리의 상상이다. 이 이야기가 현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80년대에 권력에 의해 탈취당하는 사건을 많이 보았다. 권력에 밉보인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의 아픈 역사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으며 미시즈 윌슨에게 배운다. 빌 펄롱에게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고 그 아름다움을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시즈 윌슨의 가르침이다.

자상한 노부인은 미혼모인 펄롱의 어머니와 펄롱을 거두고 펄롱에게 글자를 가르쳐주었다.

세심한 노부인은 누구나 어휘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이듬해 펄롱은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했다.

다정한 노부인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펄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선량한 노부인은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했다.

미시즈 윌슨의 가르침이 스며든 펄롱은 아이들의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들-예배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돈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것-을 할 때 진한 기쁨을 느낀다.

클레어 키건은 마지막에 말한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는지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어쩌면 클레어 키건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통해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녀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미시즈 윌슨과 빌 펄롱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힘든 세상이라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주변을 잘 살핀다면 작지만 따스한 불빛이 세상에 퍼질 것이다.   


덧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추천해 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아내의 구두를 맨발의 소녀에게 주지 않고 맨발로 데리고 가는 펄롱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다른 생각이다.

구두는 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내에게 주는 선물이다. 세라(맨발의 소녀)는 그의 딸이 아니다.  아일린은 수녀원의 아이들에 대한 펄롱의 걱정에 대해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라고 말했다. 그녀는 펄롱만큼의 자비심이 없다. 게다가 아직 주었든 주지 않았든 구두는 그녀의 발에 맞춘 '아일린의 구두'이다. 일단은 소유의 주체에 대해서 펄롱은 구두를 세라에게 줄 자격이 없다. 펄롱은 세라를 구하자마자 바로 펄롱의 외투를 건네 아이의 몸을 따뜻하게 했고, 본인은 추위 떨었다.


소설은 펄롱과 세라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끝났지만, 펄롱은 아일린에 대한 배려로 결국 구두는 신기지 않은 것이다. 만약 아일린의 새 구두를 세라가 신고 집으로 들어갔다면, 아일린은 세라의 존재에 대해 질투로 폭발하리라는 것이 여자인 나의 생각이다.

우리에게도 속설처럼 전해지는 말이 있지 않은가. 출산하여 둘째 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가면 첫째 아이의 질투가 '첩을 데리고 집으로 온 남편을 보는 본부인'의 상태와 같다고. 거듭 말하지만, 세라는 아이를 출산할 만큼 성장한 어른이다. 세라의 존재가 아일린에게 절대 편한 존재는 아닐 텐데, 그녀의 구두를 신겨서 데리고 간다면 그녀는 팥쥐엄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작가는 그런 펄롱의 마음을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다."라고 했다. 그녀를 구출한 것은 무모한 용기와 행복이지만, 집으로 다가갈수록 두려움이 앞선다.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로 소설은 끝난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나와 길을 헤매다가 만나 길을 알려주던 노인의 말.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우리가 원하는 길은 우리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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