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1943. 더 클래식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 크레타섬의 이클라이온의 외진 언덕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가 있다. 삐딱한 십자가에 덩그러니 무덤만 두 개다. 하나는 카잔차키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인인 엘레나 사미우의 것이다. 그리스 여행을 마치며 돌아오는 길에 카잔차키스의 대표작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바로 읽으려 했지만, 이제야 읽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원래 제목은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시간」이다. 카잔차키스가 1917년에 펠로폰네소스에서 탄광 사업을 같이했던 실존 인물인 ‘기오르고스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카잔차키스가 그렇게 이야기했겠지 싶다. 내가 만난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보니 나는 그가 만들어낸 허구 인물이라고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수사관이 목격자인 버벌의 이야기만 듣고 그를 풀어주지만, 실은 용의자인 ‘카이저 소제’가 버벌이 만든 허상이었던 것처럼. 버벌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좁은 사무실의 사진과 지도와 그릇을 이용하여 참말 같은 거짓말을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의 모험은 실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겪었던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제목은 맞지 않다. 조르바는 마케도니아 출신이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 그리스는 독립하지만, 마케도니아는 독립하지 못한 채 1912년에는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분할된다. 1929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었다가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탄생한 것은 1991년이 되어서이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그를 그리스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인 이상의 자유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아마도 외국에서 번역되면서 평범한 이름보다 독특한 이름으로 『그리스인 조르바』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해하자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애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카잔차키스가 태어났을 1883년의 크레타는 오스만 투르크령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반란을 진압하는 오스만 투르크군을 피해 낙소스로 두 번이나 피신했다. 이클라이온으로 돌아와 중등교육을 받고, 아테네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12년에 발칸전쟁이 일어나자 자원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1912년은 두 가지에서 의미가 있는데, 크레타가 독립하여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고,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그리스가 차지했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공통분모는 1912년이다. 더 확장해서 말하면 크레타에서 그리스 문명이 처음 시작되어 북으로 올라갔고,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남으로 내려와 도시국가였던 그리스를 통일했던 역사가 있다. 카잔차키스는 1919년 러시아 내전 중에 카프카스 지역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의 본국 송환을 돕는 그리스 정부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했고, 1920년대에 독일에서 공황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경험들이 『그리스인 조르바』에 녹여있다. 결국 『그리스인 조르바』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시간」이 아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삶과 시간」이다.
알렉시스 조르바는 ‘펄떡펄떡 뛰는 심장과 푸짐한 말을 쏟아 내는 커다란 입과 위대한 야성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기쁘면 산투르를 감미롭게 연주하고, 분노하면 수염을 다 뽑아버리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고 즐거우면 깡충깡충 뛴다. 喜怒哀樂이 확실하다. 거기에 거짓말도 잘하고 사기도 잘 치고 협박도 잘한다. 크레타에 가는 배편을 기다리는 ‘나’에게 조르바가 다가왔고, 그는 광산에서 일도 했었고, 수프도 잘 끓인다고 말한다. 마침 ‘나’는 수프를 가장 좋아하고 지금 크레타에 갈탄 광산을 채굴하러 가는 길이다. 그들의 첫 대화에서 ‘인간과 자유’가 처음 등장한다. 이 자유로운 인간이 카잔차키스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크레타에서 갈탄 광산을 하지만 갈탄이 그다지 성과가 없자 케이블을 만들어 목재를 운반하는 일을 하려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시운전하는 날에 케이블은 망가지고 ‘나’와 조르바는 크레타를 떠난다. 어느 해 가을부터 다음 오월까지. 그들은 세 계절을 크레타에서 함께 보냈다. 그들이 만난 사람들은 프랑스인 여관 주인 오르탕스 부인, 동네의 노인들, 동네의 남자들이 모두 탐내는 아름다운 과부, 산꼭대기 수도원의 수도승들 등이다. 오르탕스 부인은 한때는 유명한 가수로 세계를 여행하며 명성을 누렸지만, 지금은 쭈그렁 할머니가 되어 여관을 운영한다. 호색한인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을 ‘부블리나(그리스 독립 전쟁의 여걸)’라 부르며 그녀와 사귄다. 동네의 노인들은 카페 겸 정육점에 모여 사람 구경하는 재미로 지낸다. 그들은 가부장적이며 그들의 아내들은 남편들의 행동에 못마땅하지만 침묵한다. 아름답고 젊은 과부는 마을 남자라면 늙든 젊든 모두 탐내고 결국 상사병에 걸린 청년이 자살하면서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수도승들은 음탕하고 동성애를 즐기며 살인도 한다. 하지만 수도원이라는 장벽에 가려 은폐되고 결국 조르바는 미친 수도승을 조정하여 수도원에 불을 지른다. ‘나’와 조르바를 뺀 진짜 그리스인들의 모습은 이렇다. 이성도 없고, 염치도 없다. 오르탕스 부인이 죽자 그녀의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훔친다. 장례식에 와서는 신나게 웃고 떠든다. 크레타인인 ‘나’는 이성적이지만, 감정이 없다.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지고 있고, 주머니가 넉넉하여 인심은 좋지만, 한때 좋아했고 하룻밤을 보낸 과부가 살해되었음에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부의 죽음과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보내는 이는 조르바 한 명뿐이다.
‘나’는 갈탄 사업의 사장이지만, 조르바는 ‘내’가 탄광에 오는 것을 싫어한다.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니 뭐니 뜬소리나 하고 작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얼씬도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오두막과 해변에서 혼자 논다. 그리고 조르바가 돌아오면 조르바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마치 ‘그’의 외할아버지처럼.
_크레타 섬에서 꽤 큰 마을에 사셨던 내 외조부는 매일 저녁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갓 도착한 나그네가 없는지 찾아보는 게 버릇이었다. 혹 있으면 데려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대접한 뒤 안락의자에 앉아 길쭉한 터키식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손님에게-이 양반에게 이제 음식값을 치러야 할-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자네는 뭘 하는 사람이고, 이름이 뭐고, 어디서 왔고, 또 자네가 본 도시와 마을이 어떤지, 모두, 그렇지, 아주 깡그리 얘기해 달란 말일세.”_
‘나는 외조부의 습관을 따라하고 있는 셈이었다.’ 조르바는 그리스, 불가리아, 콘스탄티노플, 러시아, 터키로 그를 데리고 갔고, 여자와 전쟁과 여행을 얘기해 준다.
조르바가 게릴라로 참전한 불가리아 전쟁은 1912년에 카잔차키스가 참전한 발칸전쟁이다. 조르바의 엽서에 등장하는 아토스 산의 수도승들은 카잔차키스가 환멸을 느낀 수도승들이다. 또 카프카스에서 그리스인 동포를 구하는 친구 스타브리다키는 1919년에 카잔차키스가 특사로 갔던 모습이다. ‘나’는 마르크가 폭락한 독일의 대공황 시절에 독일에서 조르바의 편지를 받고, 아이기나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며 조르바를 남긴다. 이렇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간들에서 알렉시스 조르바가 탄생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가 만든 ‘자유’라는 세계이다.
조르바는 모든 것을 삶을 통해 배웠다. 비싼 버찌를 질리도록 먹어 결국 토하면서 버찌를 안 먹기 시작했고, 할머니를 보면서 여자들은 늙든 젊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알았고, 불가리아 전투 중에 살해한 목사의 남겨진 자식들을 보고 참상을 깨닫고 전쟁터에서 도망쳤고, 사회주의에 빠진 ‘나’에게 그런 이상은 없다고 한방 날린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자존심이 강하고 교육받은 이들보다 훨씬 이성적이며 더 깊은 사상을 가진 그를 존경했다...우리는 그를 일컬어 '조르바는 위대한 인간'이라고 했다.”
크레타에서 헤어지기 전날, 조르바는 ‘나’에게 말한다. “보스는 자유롭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묶인 줄이 다른 사람들보다 길뿐입니다. 그 긴 줄 끝에 앉아 오가니까 그걸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잘라 버리지는 못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조르바처럼 모든 것을 쉽게 버리고 떠나는 것이 자유는 아닐 텐데, 『그리스인 조르바』의 ‘나’ 또한 하고 싶은 대로 여기저기 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찬양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래서 드디어 삶의 긴 줄이 끊어진 후에야 ‘진정한 자유’를 느끼며 묘비명을 그렇게 썼나 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필력에 빠져 단숨에 책을 읽었다. 큰 숙제를 끝냈다.
더하기 하나
『그리스인 조르바』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두 번 후보에 올랐지만 끝내 타지 못했다.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그리스인 조르바』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만 보고 말한다면 그리스인과 여자들과 종교에 대해서 우롱할 자격은 그에게 없다. 그가 ‘그리스인 카잔차키스’라고 해도 말이다. 이성과 감성이 없는 것이 진짜 그리스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1953년 그리스정교회는 신성모독을 이유로 『그리스인 조르바』와 『미칼레스 대장』,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금서로 지정했다.
더하기 둘
‘나’의 외조부 무스토요르기 영감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가장 사랑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파이아케스족의 왕인 알키노오스이다. 알키노오스가 오뒷세우스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이름을 말해주시오… 그대의 나라와 그대의 백성과 그대의 도시를 말씀해 주시오… 그대는 어느 쪽으로 떠돌아다니셨고 어떤 나라들과 인간들에게 가셨는지 인간들 자신과 그들의 살기 좋은 도시들에 관해 말씀해 주시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그리스어로 번역했고, 『오뒷세이아』의 이어진 이야기인 『오뒷세우스』를 썼다.
더하기 셋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리키가 계속 나온다. 크레타인들은 식후 술로 리키를 즐긴다. 크레타를 여행했을 때 식당 주인들은 식사 말미에 리키와 디저트를 주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동안 리키의 추억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