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개인 시각과 의견이 강조되어 가는 민주사회 내에서사회적 판단 기준점은 열띠게 논의되어 가는 동시에 점차 모호해진다. 대체로 뚜렷하지만은 않은 그 기준점은 개인의 판단 기준 형성에 큰 영향을 주기에, 우리가 다른 이들을 판단할 때 쓰이는 기준은 우리의 잣대이기도 하지만 온전히 우리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좋고 나쁨, 평범함과 이상함, 아름다움과 흉측함, 등,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일상적으로 판단하고 분류한다. 이에 관한 나의 가치관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보다는 한국, 캐나다, 프랑스, 세 사회와 문화 틈새에 의해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좋은 사람'의 정의를 포괄적으로 '나에게, 또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이 정의는 흐리터분하다.
제일 먼저 한국의 사회적 기준을 고려해 보자면, 캐나다와 프랑스에 비해 '좋은 사람'이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비교적 뚜렷이 정의되어 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해는 때에 따라 집단에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 돼 버리기도 한다. 한 예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는 특히나 지속적이고 빈번하게 발생하며 파급력이 크다. 연예인, 또는 정치인들이 대중에게 사과하고 휴식기를 갖거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래도 아직은 유교 신념에서 비롯된 사상을 공유하고 있는 한 민족이 대다수인 한국 사회에서는 다문화로 이루어진 캐나다나 프랑스 사회보다 사회적 판단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덜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이, 그리고 그들의 사회가 판단하는 좋고 나쁨의 정의는 - 세대 간, 성별 간, 등 분쟁이 많을지라도 - 분명한 편이며, 또 그만큼 그에 대해 개인이 좀 더 독립 비판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캐나다 사회 내에서 다문화정책은 정치적, 문화적 이념이자 인구통계학적, 또 사회적 현실이기도 하다. 캐나다 정부가 캐나다 인구의 다양성을 내세워 국가적 문화를 형성하려는 만큼 여러 민족 및 문화 그룹들,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시각과 의견이 존재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미 많은 민주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PC 문화(political correctness culture: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적 코드, 즉, 차별을 피하고자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나 언어를 사용할 때 주의하거나 피하는 문화적 특징)가 캐나다 사회에서는 특히나 크게 작용하고, 이는 인구 및 시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사회에게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어느 정도 일치된 톤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만큼은 아닐지라도, 캐나다 사회와 캐나다인 개인의 좋고 나쁜 사람 판단 기준에도 엄격한 면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작가의 박사논문 인용)
그에 비해 내가 관찰한 프랑스는 개인주의가 강조되어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끼치는 해에 관해선 사회적으로 너그러운 편이다. 보편적으로, 프랑스 사회는 개인의 도덕 수준을 사회적 맥락으로 재구성하지 않는 편이다 - 한국과는 극명하게 반대되는 트렌드이다. 유명한 예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자신의 고교 재학 시절의 스승이자 24살 연상의 브리짓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소소한 가십거리가 되었을 뿐, 사회적으로는 물의가 되지 않았다. 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마크롱과 브리짓을 예로 드는 것뿐이지 실은 프랑스 정치인들의 로맨스는 그들의 도덕적 기준을 의심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 한국, 캐나다에서는다른 정도로 파장들 일으켰을만한 일들. 개인적인 발상과 행동이 비교적 너그럽게 허용되는 프랑스인들에게 해당하는 가장 공통적인 사회적 잣대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위협을 끼치는가, 이지 않을까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이어보고 싶다.
캐나다 부모님 곁을 떠나 프랑스에서 독립한 지 1-2년, 열심히 외식하고 불규칙하게 생활하던 것이 몸에 고스란히 드러나듯 생에 처음으로 살이 꽤나 쪄버렸었다. 겨울 휴가철에 향한 캐나다 집, 나를 보고 '프랑스에서 밥을 잘 먹었구나?' 하신 엄마와 '누나 못 알아보겠다, '며 놀란 동생을 빼고 내 지인들은 모두 그저 '보기 좋다, ' '전엔 너무 말랐었는데 뭐, ' '건강해 보여, ' 하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분명히 살이 많이 쪘었고 그전에 비해 확연히 피로를 쉽게 느끼곤 했기에 그들이 건네는 말은 내게 위로가 아닌 위로인 셈이었다. 그는 내가 그해 여름에 한국에 갔을 때나 일상에서 마주하던 프랑스 주변인들의 피드백과 분명히 차이 났다 - '너 살 좀 빼야겠다, ' '왜 이렇게 살쪘어? ' 하는, 캐나다인으로서의 나에겐 상처가 되던 팩트폭행.
미적 기준이 자연스레 일상에서 강요되는 듯한 한국 문화, body positivity(자기 몸, 신체 긍정주의)와 PC문화가 크게 작용하는 캐나다 문화, 그리고 미적 기준도 기준이지만 개인의 의견 표현 자유가 현저한 프랑스 문화. 재미있는 건, 내가 한국인들이나 프랑스인들에게 캐나다에선 이랬다, 하고 얘기하면, 그들은 '솔직히 말할 건 해줘야지 널 생각해서, ' 라며 나의 캐나다 친구들이 너무 나에게 너그럽다고 말하곤 했고, 캐나다인들에게 한국이나 프랑스에선 그랬다, 얘기하면, 그들은 '어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느냐, ' 하고 놀라기 십상이었다. 그 후로 다시 살은 빠졌지만, 여전히 그때 느낀 문화차이는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 미적 기준, 발상과 표현의 차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코드. 무엇이, 누가 옳은 것일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연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바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다. 프랑스인들이 바람에 대해 얘기하는 온도는 한국과 캐나다에 비해 어쩐지 좀 미적지근하다고 느낀다. 물론 다수가 바람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지만, 웬만해서는 바람을 핀 것만으로 '천하의 나쁜 놈'이 되지는 않는다 ('connard' (머저리 또는 asshole (재수 없는 새끼)) 정도면 모를까). 일반화하자면 한국인들에게 바람은 절대 악이며 차이고 질책받아 마땅한 일이다. 캐나다인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문화로 형성된 사회인만큼 민족 및 문화적 그룹 내에서 바람을 정의하고 해결하는 데에 차이가 있고, 그렇대도 어쨌든 주류 문화는 서구 문화이다 보니 바람에 대한 사회적 질책이 한국보다는 덜한 편이다. 그렇게 두 사회에서 바람은 다른 정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가 바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양쪽 사연이 있을 거란 의견도 의견이지만 연인 사이의 일은 지극히 개인사로 취급하기에 타인의 질책에서 벗어날 때도 있고, 그러므로 그다지 숨길만한 일도 아니라고 대체로 간주한다.
처음 프랑스에 도착한 20대 초반의 나는 연애 경험이 한 번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재 시각으로 보면 꽤 순진한 시각으로 사랑, 또 연애를 바라봤던 것 같다. 처음엔 프랑스인들이 바람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온도 차를 느끼며 그들과 나의 사이에 분명한 거리감을 느끼곤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어오며, 또한 나 자신도 전 남자친구의 바람을 직접 경험하게 되며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만큼 모든 것이 흑백이 아니고 절대 선악이란 건 없다는 것을. 바람을 피우는 건 분명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이지만 바람은 굳이 나쁜 놈들만 피는 게 아니라고, 연인의 배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개개인의 판단이며 그리고 그 결과는 당사자들도, 주변인들도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와 개인이 따르는 도덕적 기준. 무엇이, 누가 옳은 것일까?
이미지 출처: Javier Allegue Barros / Unsplash
예로 제시한 두 상황에 관해 무엇이, 누가 옳은 것인지 묻는 말에는 물론 정확한 답이 없는 듯하다. 세 나라의 사회와 그에 속한 개인들에겐 각자만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비행기만 타고 가면 이렇게나 달라지는 게 사회적 판단 기준이며 나의 가치관과 신념도 맥락, 문화, 사회에 따라 변할 수 있기에, 나의 판단기준을 남들에게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내게 적용되는 사회적 기준이 날 힘들게 할 땐 나 자신이 내 중심을 알고 잘 버티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을 것 같다고 느낀다. 때로는 쉽지 않겠지만, 힘들고 지칠 때 내 맘을 어르고 달래기에는 그저 적당한 마음가짐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