習作 | 슬로스

sloth [slɔːθ, slouθ] n. ① 나태 / ② 나무늘보

by 윤그림

슬로스

sloth [slɔːθ, slouθ] n. ① 나태 / ② 나무늘보



아무리 생각해도, 부지런한 미친놈이 너무 많았다.

오늘도 승주의 사무실로는 오 분에 한 통씩 전화가 걸려 왔다. 스무 통 중 열아홉 통은 진짜배기 제보와는 거리가 멀어 방송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 걸려온 것 중 가장 어이없던 건 ‘개새끼들이 자꾸 집 앞에 똥을 싸는데 주인들이 치우지를 않는다’는 항의였다.

선생님, 왜 그런 내용을 여기에다 전화해서 화풀이하십니까. 여긴 방송국이잖아요.

승주는 초반의 3분 정도는 합당한 이유를 찾아보려 정중히 물으며 응대했지만, 그 모든 수고가 쓸모없으리라 금세 깨달았다. 남자는 ‘몰지각한 견주가 많아지며 자기 집 주변이 점점 개똥 때문에 더러워지는 이유’가, 바로 승주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 때문이라고 했다.

“니미, 니들이 개새끼 키우는 사람들 시시덕거리는 것만 내보내지, 청소하는 건 방송 안 하잖아? 그러니 내가 이러잖아, 씨발.”

니미? 씨발이라고?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만이 째깍대던 사무실에서, 승주는 피디와 작가 동료들에게 마치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오직 본인만이 듣고 있는 불쾌한 대화가 실재하는 것임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동료들도 그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근무 시간 내내 말 한마디 잘 건네지 않는, 소심하면서도 건조한 그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제가 이런 험한 일도 합니다. 예? 승주는 이런 행간을 좀 봐달라고 은근 과시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팀원들은 여전히 각자의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승주는 혼자 소음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져 실제로 얼굴이 붉어졌다. 접점 없던 통화가 허무하게 끝난 뒤 그는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조용하던 사무실에 <킬러스 Killers>의 노래가 헤드폰 주변으로 아지랑이처럼 새어 나왔다. “I got a soul, but I'm not a soldier... 제게 영혼은 있지만 맞서 싸울 힘은 없어요. I got a soul, but I'm not a soldier...” 두툼한 헤드폰의 귓불 밖으로 새어 나온 작디작은 소리 정도, 딱 그만큼이 이 팀의 관리자인 그가 차지하는 비중 같은 것이었다.



<애니멀 라이프>의 사무실은 마치 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에 있었다. 인간들의 이야기보다는 제목 그대로 동물의 그것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기 때문이었을까. 교양제작국의 프로그램 일곱 팀이 모여 있는 12층에는 섞이지 못했고, 홀로 8층의 구석진 공간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들키면 안 되는 무언가를 가방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모양새였다. 일주일 단위의 편성표를 가득 채운 프로그램 중, 매주 월요일 아침 경영진에게 보고되는 ‘주간 시청률 동향’에 언급되지 않는 몇 안 되는 하나이기도 했다.

“지금 사장이 몇 년 전에 부임할 때 그랬거든. 쓸데없는 년놈들은 한 곳에 모아야 열심히 일하는 애들 분위기 안 버린다고.”

자조 섞인 농담이 오가던 8층에는 각각의 열정도, 회사의 기대도 식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가 이 회사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으며 분명 어딘가 애매한’ 부서의 소속이었다. 허여멀건한 회색 벽과 수십 개의 잿빛 캐비닛이, 그 공간을 느릿느릿 오가는 사람들의 안색과 묘하게 어울렸다.

5개월 전 승주는 <애니멀 라이프>의 팀장이 되었다. 이 팀에 오기 직전에는 [11년 차 교양 PD]라는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고 사내 노동조합에서 1년간 [총무국장]이라는 직함으로 일을 했다. 노조는 공채 출신 기자나 피디들이 기수별로 한두 명씩 차출되어 돌아가며 봉사하는, 사실 거창할 것 없는 자리였다. 실전감각은 살짝 떨어질 수 있겠다만, ‘나인 투 식스’라 1년 동안 머리를 식히는 느낌으로 가는 곳. 여기 방송국 정직원들 중에는 노조를 그러한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임금협상 시기에 경영진들과 각을 세우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승주가 조합에 있었을 때만큼은 딱히 민감한 이슈도 없었다.

그러나 노조 전임(專任)으로서의 기간이 끝난 뒤 다시 교양국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국장은 포로에게 고문을 시작하는 장교의 표정을 지으며 먼저 <애니멀 라이프> 팀의 빈자리 얘기를 꺼냈다. 우월한 자가 가질 수 있는 교만이 입가에 묻어났다.

“얌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어. 지금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누가 봐도 좌천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근무명령이었다. <애니멀 라이프>는 계속 유지하기에는 너무 낡았고, 그렇다고 폐지하기에는 애매할 정도의 시청률이 아슬아슬하게 나오던 그저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8층에 딱 맞춤이었다.

그러나 승주가 좌천이나 유배라고 느꼈던 가장 큰 이유는, 최근 몇 년간 그 팀을 맡았던 과거의 수장들이 모두 구제불능의 문제아 같은 선배들이기 때문이었다. 여자 작가들 앞에서 ‘내 좆맛은 여자들이 못 잊더라’며 화류계 무용담을 늘어놓아 정직 6개월의 징계를 받았던 부장 PD도, 제작비를 제집 생활비처럼 쓰다 걸려 3년간 비非제작 부서를 전전하던 차장 선배도 현업 복귀를 이 팀으로 했다.

승주는 교양국의 군계일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 십 년 동안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던, 적당히 괜찮은 닭이었다. 어쩌면 닭 떼 가운데에선 꽤 토실한 놈 중 하나일 거라 믿었다. 국장이 말한 ‘그런 거 아니’란 말은 그래서 오히려 ‘그런 거’라고 들렸다.

“그때 일은 다 잊었거든? 괜히 말 만들지 말고.”

작년 말, 국장이 직접 진행하던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 성매수 전력이 있던 패널 하나를 출연시켰다. 승주는 노조를 대표해 출연자 선정의 문제를 지적하는 성명서를 썼다. 그 전문가가 국장과 친분이 있다는 의혹도 살짝 담아내었는데, 그건 조합에서는 유일한 PD 출신인 승주만 알고 있던 것이었다. 쓰고 보니 국장이 그 출연자와 함께 업소에 갔을 법한 뉘앙스가 짙게 깔렸다. 조합의 동료들이 ‘묘하게 잘 썼다’고 평가했던 그 대자보가 사내 게시판에 붙고 난 뒤 ‘사장이 국장을 불러 조인트를 깠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았다.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승주는 ‘PC하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 않은 이유 탓에 한직으로 밀려나는 것이란 의심에는 이상하게도 동요되지 않았다. 다만 색욕과 물욕으로 구설에 올랐던, 구질구질하며 혐오스러운 선배들과 도매금으로 비치게 될까 입이 꺼끌거렸다.



3, 4주 전쯤 팀 전체 회의에서 나무늘보를 촬영해 보자는 제안을 가장 먼저 꺼낸 것은 승주였다. 애초 계획은, 그걸로 요즘 유행한다는 ‘느리게 사는 것의 미학’을 은유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팀장의 기획 의도를 한참이나 벗어난 후배 PD 민의 편집본은 단순한 ‘나무늘보 대백과’에 가까웠다. 민은 편집 툴에서 촬영 원본의 속도를 ‘3000%’로 설정했다. 그래도 화면 속 나무늘보의 움직임은 느려 터지기 짝이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지루했고, 결정적으로 이건 팀장이 생각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승주보다 3년 늦게 입사한 민은 이 팀의 터줏대감이었다. 근 3년째 <애니멀 라이프>에서 3주 간격으로 꼭지를 제작해 왔다. 동료들은 그가 만든 15분 남짓의 결과물에 항상 ‘잘 말아왔다’는 평가를 하곤 했다. 승주가 보기에는 잔재주였지만, 이 팀에서 짬밥을 한참 더 먹어 사료史料가 많이 쌓인 민은 잔머리와 임기응변으로 팀장 이상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승주는 모니터의 나무늘보를 초점 없이 쳐다보다 갑작스레 형 성규를 떠올렸다.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너무 답답해서 그의 모든 행동을 대신해주고 싶을 만큼, 인생 자체를 빼앗아 대신 살아 주고 싶을 만큼 느리고 굼떴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형의 이미지를 기억해보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서 밥은 먹고 다니는 걸까.

승주는 목적 없던 눈을 깊게 깜박인 뒤, 초점을 다시 모니터로 옮겼다. 형의 잔상이 나무늘보로 디졸브(Dissolve) 되었다. 민이 마우스를 빼앗듯 잡아채며 변명 같은 설명을 이어갔다.

“앞부분은, 쓸모없어 보이는 이 동물이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랑 방법에 집중하려고. 그러다가 후반부에는 과거 기록에서 <모든 포유류 중에서 가장 잘못 설계된 동물, 그러나 가장 삶에 집착한다!>, 이 부분을 물고 가는 거죠. 저는 전문가 인터뷰 중에서 이 부분이 제일 재밌던데.”

보름 전부터 자료조사와 촬영을 함께 진행했던 민은 의기양양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다. 팀장의 기획 의도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표정으로 민은 존댓말과 반말을 아주 아슬하게 섞고 있었다.

‘선배가 본인의 기분이 어떤지 눈치를 보고 있다’는 상황을 민은 즐기고 있었고, 승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민은 지난해 평가에서 교양국 최상위 10%만 받을 수 있는 ‘S등급’을 받았다. <애니멀 라이프>에서는 8년 만에 나온 S사원이었다. 승주는 열 명 중 일곱 명 정도가 받는다는 B를 받았는데, 민은 승주의 성적을 알고 있었고 본인이 더 잘 나왔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뻗대고 싶어 했다.

“믿거나 말거나인데, 인용할 수 있을 만큼은 옛날 기록이 남아있거든요. 뇌를 제거하고도 서른 시간 동안 살아있었다거나, 30미터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했다거나.” 영어가 빼곡한 논문에서 <어떤 동물이라도 즉사할 만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나무늘보는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라는 문장이 CG로 강조되었다.

30미터? 네 허언처럼 과장이 심한 기록이겠지. 이런 새끼가 어떻게 S를 받았을까.

“먹은 것이 몸 밖으로 나오는 데 50일이 걸릴 만큼 느린 신진대사... 그러나 6,400만 년을 버텨왔고, 전 세계 대형 포유류 개체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그 수가 많은...”

시작하지를 말았어야 하는 기획이었어,라고 들리는 한숨을 내쉬며 승주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면서 그의 집안에서 가장 잘못 설계된 포유류, 성규를 계속 떠올렸다. 작가가 구성안 한쪽에 급하게 갈겨쓴 메모 때문이었다.

<완벽한 패자처럼 보이는 삶. 그러나 험난한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거꾸로 매달려 최소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모든 요소가 개조된 셈이었다.>



“성규 오빠가 집 나간 게 언제였지?”

이제……. 아홉 달, 열 달쯤? 이젠 잘 기억도 안 나. 갑자기 왜?

“그냥.”

속옷차림으로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세연은 갑자기 형이 가출했던 때를 물었다. 승주와 2년째 사귀고 있는 세연도,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성규와 인사를 나누곤 했다.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승주의 몸을 핥으며, 세연은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둘의 섹스는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형이 집을 나간 이후로, 그녀가 눈치 볼 필요 없이 집에 올 수 있었던 건 유일하게 좋은 부분이었다. 며칠간 몸이 달아올랐던 세연은 오늘도 승주의 퇴근에 맞춰 작정하고 찾아왔건만,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그는 쉬이 흥분이 되지 않았다. 물렁한 교미를 가까스로 마치고 그가 나무늘보처럼 엎어졌을 때 세연은 화장실로 향하며 말했다.

“성규 오빠한테 또 뭐, 뭐 잔뜩 와 있던데. 우편함에 있던 거, 책상에 뒀어.”

성규와 승주는 공교롭게도 생일이 똑같은 2년 터울이었다. 외할머니는 누굴 부르든 항상 "성주야"라고 외쳤다. 그래서 어려서부터는 ‘둘도 없는 형제’라는 말을 질리게 들어왔다. 그 둘이 서로 하나같지 않다고 느꼈던 건 성규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는데, 승주가 느끼기에 형의 지능은 그때 정점을 찍고 퇴화를 하는 것 같았다.

성규는 어느 순간,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하는 동네 바보 형이 되어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했지만 항상 일분을 넘기지 못해 문맥을 놓쳤고, 책을 읽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다. 제멋대로 먹고 제멋대로 놀다 제지를 당하면 눈을 뒤집고 거품을 물었다. 중학교 2학년을 끝으로 학교는 가지 않았다. 정신과에서 그에게 준 병명은 ‘난치성 간질을 동반하지 않은 간질발작’과 ‘중추 기원의 현기증’이었다. 그렇지만 승주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형이 그런 어려운 병명을 실제로 갖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꾀병이지, 지 맘대로 편하게 살려고 발악하는 병신, 버러지 같은 놈.

승주는 세연이 책상 위에 가져다 놓은 우편물을 들춰 보았다. 여섯 개의 봉투였다. 자동차 캐피털과 대부회사의 이름이 적힌 추심 서류가 두 통, 2개의 이동 통신사에서 보낸 각기 다른 휴대전화 번호의 미납 요금.

할부로 차를 사? 미친 새끼, 휴대전화 요금이 한 달에 삼십만 원?

나머지 둘은 카드회사에서 보낸 연체 요금 안내 서류였다. 미루어 짐작컨대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린 지는 여러 달 되었을 것이고, 현금서비스로 매달 기백만 원을 퍼내가며 살고 있는 듯했다.

“실종 신고는 했어?”

나무늘보 같은 새끼가 어떻게 이런 속도로 돌아다니는 걸까.

형이 벌이고 다니는 일은, 믿기지 않을 만큼 다채로웠다. 적어도 이 우편물들이 그의 진짜 발자국이라면 말이다. 하루는 서울의 자동차 판매장에, 그다음 날은 수원의 휴대전화 대리점, 그다음 날은 명동의 대부업체에 도장을 찍는 식이다.

자동차 캐피털에서 온 서류는, 성규 명의 차의 잔존 채무금 이천 육백만 원을 곧 압류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빨간 글씨가 아주 위협적이었다. 남을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빚지면서는 살고 싶지 않은 승주에겐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어제의 서류까지 모두 합하면 아마도 성규 명의의 이 집을 팔아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20세기에 지어진 낡고 작은 아파트라 해도 서울에 있는 부동산인데, 이만한 돈을 서너 달 사이에 써 버리다니. 그 기간 동안 집으로 날아드는 우편물을 다 보관하려면 겨울 패딩을 살 때 담아 왔던 큰 쇼핑백 하나가 필요했다.

승주는 다시 쇼핑백을 뒤집어 형 앞으로 온 서류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사무실을 내고, 차를 샀다는 내용이다. 세무서에서 보낸 ‘사업장 개소를 축하합니다!’라는 안내문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커다란 서류 봉투 하나에는 서울 외곽의 자동차 전시장에서 보내온 신차 카탈로그가 있었다. 그 얇은 책자에는 판매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스탬프로 찍혀 있었다.

다음날 어두운 낯빛으로 출근한 사무실은 조용했다. 오전 열한 시가 살짝 지나있었지만, 출근한 사람은 민 하나였다. 사무실에서 어젯밤의 예능프로를 보며 히죽대던 민은 의자에 몸을 푹 묻은 채 고개만 까딱여 인사를 해 왔다.

건방진 새끼.

텅 빈 사무실을 보니 짜증이 몰려왔다. 사무실 앞 복도 구석에 던져놓은 케이지에서는 개 냄새가 스멀스멀 나고 있었다. 그것도 싫었다. 승주의 머릿속은 성규의 동선처럼 어지러웠다. 가능성은 없겠지만 차라리 그새 기적이라도 일어나 정상의 인간이 되어 면허도 따고 사무실도 낸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선배, 나무늘보가 영어로 ‘sloth’잖아요. 그런데 그게 ‘나태’라는 뜻도 있는 거 아세요? 그 7대 죄악에 나오는 그 나태함.”

그걸 이제 알았니.

홍보문에 쓸 문구를 고민한다던 민은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Sloths ain't such a sloth!> 나무늘보는 나태하지 않다, 라임 끝내주지 않아요?”

내 말이. 그거 우리 형 얘기야, 이 새끼야.



‘선배님, 손망실 보고서 결재 좀 부탁드릴게요. 지난번 동물원에서 깨졌던 캠코더입니다.’

막내 FD 하나가 문자를 보내왔다. 민과 함께 이번 촬영을 진행하다 카메라 한 대를 부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동물을 다루는 이 팀에서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승주는 오늘따라 신경이 곤두섰다.

이곳에서 본인이 존재감을 드러낼 때는 이 팀에 좋지 않은 문제가 생겼을 때뿐이다,라는 자책으로까지 생각이 흘러갔다. 그러면서 건강 프로 어디선가 보았던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우리 몸의 어느 부위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진다면 그곳이 곧 아픈 부위란다. 건강하다면 그것이 몸에 달려있다는 것 자체를 느끼며 살지 않는다고. <애니멀 라이프>의 관리자, 여기서의 그가 딱 그랬다. 촬영 도중 출연자가 변심하거나, 이웃에서 민원이 들어온다든가. 영상의 출처를 빠뜨려 생기는 저작권 시비라든가. 그럴 때에만 그가 ‘진짜로’ 필요했다.

PD로 일해오며 그간은 느껴보지 못했던 자괴감이었다. 그럼에도 이 팀에 올 때 승주는 ‘쿨한 사람’이고 싶었다. 시쳇말로 최대한 시크해 보이기를 바랐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일을 잔뜩 떠넘기고 자주 화를 내던 과거 세대의 팀장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보이고 싶었다. 시청률과 제작비로 윗선의 관리자들이 스트레스를 주는 일을 후배들에게까지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팀에 애정은 없었지만, 그 스스로는 그러한 이미지만큼은 지켜야겠다는 일종의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노동조합에서 1년을 보내기로 결정했던 것도 사실 같은 논리 때문이었다.

방송국 내부의 암묵적인 규칙은 해마다 공채 동기들 중에서 한 명이 총대를 메는 것이었다. 그들끼리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승주의 동기들은 항상 가벼이 농을 던졌다.

“이럴 경우엔 승주가 손들지 않을까?”

그들이 이야기하는 ‘이럴 경우’라는 건, 데드라인 즈음까지 후임이 결정되지 않았을 때를 일컬었다. 대학교 조별과제가 주어질 때, 조장을 누가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눈치게임과 유사했다. 대부분은 학점을 가장 귀히 여기는 최고참 복학생이 그 부담을 떠안는다. 귀속된 집단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를 가장 절박히 바라는 사람, 혹은 도덕과 상식의 내적 기준이 가장 높은 자, 그도 아니면 결정이 미뤄지는 갈등의 시간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심약한 이가 먼저 손을 든다. 이것이 그 눈치게임의 핵심이다. 승주는 ‘성실한 자원자’라는 칭찬은 필요하지 않았으나 노동조합의 임무를 피했다는 비난까지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 기수에서는 누가 할 건데?’라는 선배들의 질문을 다른 동기들에 비해 가장 질책의 문장처럼 받아들였던 하나였다.

“피디님예, 약자라고 다 착한가요? 착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카대요.”

집행부의 이, 취임식에서 ‘조직국장’ 직함을 곧 떼는 선배는 승주에게 존댓말로 그렇게 조언했다. 능력급 연봉제 출신으로서 같은 처지 사원들의 처우를 개선해 보겠다고 전임자를 자처했던 그는, 그 일에 힘을 쓰다 누구보다도 먼저 환멸을 느꼈다던 사람이었다.

“노동운동이나 자선사업 하는 양반들이 젤 처음 부댁끼는 고비가 언젠지 알아예? 착하지 않은 약자를 만났을 때라요. 분명 도와줘야 되는 약자들인데, 인마들이 안 착한 거라. 속이 시꺼매.”

승주의 방송사는 대략 3분의 1의 정규직 호봉제, 3분의 1의 능력급 연봉제, 그 나머지 3분의 1은 비정규직의 프리랜서들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매해 공채로 뽑힌 정규 호봉제들은 대다수가 명문대를 나와 소위 언론고시라는 걸 통과한 직원들이었다. 기본급의 수준이 높았고 승진도 빨랐다. 능력급 연봉제 사원들은 과거에 계약직이나 파견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가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던 사람들인데, 나름 운이 좋기도 했겠으나 상대적으로 연봉이 적고 승진이 늦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비정규 프리랜서들의 절대다수는 외주 PD와 작가, 단순 행정직의 파견사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선 비정규 PD들의 경우 정규직의 PD들과 같은 일을 하더라도 ‘PD’ 대신 ‘VJ’로 부르는 불문율이 있었다. 계급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명명이었다.

남의 일이기만 했던 이런 갈등은 1년 동안 승주가 해결해야 하는, 최소한 해결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당면과제였다. 하지만 호봉제 사원들은 능력급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에 별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승주의 눈에는 많이 받는 그들이 조금씩만 나누면 되는 문제로 보였지만, 그건 이상일뿐이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외치는 능력급직은 호봉직을 귀족들이라며 원망하는 한편 비정규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제일 차별받는데 누가 누굴 챙기냐’는 심리였다. 비정규나 프리랜서를 챙기는 건 공채 조연출을 중심으로 한 어린 호봉직 친구들이었지만, 승주는 그들과 깊게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그것은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선민이라는 의식의 반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결론 내렸다. 파견이나 프리랜서 같은 비정규직들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 약속 안 지키고 수시로 주급 깎으려는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칭찬? 필요 없어, 욕만 하지 마. 마니아? 그딴 거 됐어, 안티나 되지 마.

최소한 뒷담화만 피하자는 생각으로 승주는 묵묵히 노조의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회사가 주저앉을 정도의 선심을 쓰지 않는 한, 아니면 거대한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전복하지 않는 한 해결책은 없다는 결론이 그를 크게 실망시켰다. 해결책이 없으니 노조와 그 역시 비난의 객체가 되어있었다.



성규를 찾아 나서기로 작정한 승주가 고민 끝에 찾은 방법은, ‘실종자의 행방을 취재하는 피디’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가족이라 읍소하는 것보다 깔끔하고 효과적일 것 같았다. 팀의 이름 없이 ‘교양 제작국 소속 PD'까지만 찍혀있는 명함을 두둑이 챙기고, 어제 막내 혁에게서 빌렸던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두툼한 다이어리 사이에 끼웠다. 허풍 칠 생각을 하니 오른손이 살짝 떨려왔다.

성규의 행적 중 가까운 곳부터 들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자동차 대리점의 판매원이었다. 승주는 <애니멀 라이프> 대신, 훨씬 잘 나가는 동료들이 만드는 시사 프로그램의 소속이라 밝혔다. 성규의 사진을 꺼내며 프로그램의 이름을 힘주어 내뱉었다.

실종된 이 분이 여기에서 차를 샀다는 기록이 있어서요.

“기억나요. 기억이 나는 게, 이 분이 같이 오신 양반이랑 제가 좀 다툴 뻔했거든요.” 승주의 위압적인 억양에도 판매원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비록 ‘차팔이’였지만 그도 대기업의 로고가 박힌 명함을 써서였을까.

“이 분 형님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제가 옵션이 어떻다 설명을 드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경상도 사투리 막 쓰시는 형님이라는 분이 뭐 이리 설명이 기냐면서 짜증을 내시더라고.”

성규와 함께 온 사람이 있었다는 싱크가 이어졌다.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우람했고, 문신을 두른 팔뚝, 짧은 곱슬머리와 굵은 금목걸이. 기억이 나는 대로 설명하던 판매원은 ‘누가 봐도 건달’이라는 수식어로 끝맺었다.

이 분이 면허가 없거든요.

순간 승주는 ‘저희 형은 면허가 없거든요’라고 뱉을 뻔한 말을 목구멍 안에서 주워 담았다.

“개인으로 구입할 때엔 그렇죠. 근데 사업자로는 출고가 되거든요. 신분증이랑 확인 다 했고. 인감, 재직증명 다 있는데.”

인감증명에 재직증명서라니. 그 병신이 그런 게 뭔지는 알까.

개인정보 운운하던 판매원은 쭈뼛대며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성규가 제출했다는 사업자 등록증이었다. 그 종이에는 형이 냈다는 회사라는 것이 적혀있었다. 에스제이 유통, 여기서 버스로 이삼십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빌딩인 듯했다. 잠시 보며 주소를 눈으로 열심히 외우던 사이, 판매원은 승주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밖으로 인도했다.

“제 생각에는 그거 ‘차깡’이에요. 저도 좀 의심스럽기는 했는데 차 사자마자 그거 담보로 대출받고 나오는 중고차들, 비일비재해요. 중고 파는 애들은 급전 필요한 사람한테 차 싸 게 넘겨받은 다음에, 거의 새 차니까 비싸게 팔아먹는 거지. 아니면 노숙자들 명의로 할부 떠넘기는 경우도 있고요. 이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아니 사람이 실종됐다니까. 제일 찜찜했던 게, 차를 사는데 옆에 있던 그 형님이 술값 생겼다면서 막 웃으셔서.”

성규의 회사라는 곳은 낡아빠진 4층짜리 빌딩에 있었다. 좁디좁은 계단 옆 나무 손잡이는 썩어 문드러진 지경이었고, 층층의 화장실에서는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402호라.

승주는 명함을 한 장 꺼내고는 초록색 불빛이 잘 보이게끔 마이크를 켰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살짝 머리를 밀어 넣어 살피고는 조심스레 들어섰다. 대여섯 평의 공간, 책상 하나, 고스톱 게임이 띄워진 컴퓨터와 전화 한 대. 그리고 갓 찍은 걸로 보이는 수천 장의 명함. 있는 것이라고는 그게 다였다.

“거 뭐예요? 누구세요?”

한 남자가 담배를 물며 복도에서 들어왔다. 승주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승주는 떨리는 손을 최대한 감추며 명함을 내밀고는 사람을 찾고 있노라 했다.

“가족이에요, 방송국이에요?”

...... 방송국이요. 이 분 아시죠?

사진을 내밀며 주위를 둘러보니 책상 위의 명함은 전부 상호가 같지 않았다. 주소, 전화번호, 팩스는 모두 같았지만 ‘XX유통’이라는 앞 두 글자는 모두 달랐다. 대충 짐작이 갔다. 어떤 식으로든 은행에 사기를 치는 현장이었다. 시사 프로그램의 이름을 들은 남자는 그때부터 조금씩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저는 진짜 별 관계는 아니거든요.”

그는 말끝마다 이 범죄의 현장과는 무관하다는 문장을 덧붙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규를 잘 알고 있노라 말했다.

“제가 게임하다 만난 형님이 소개해 줘서 성규 삼촌 알거든요. 그 형님이 처음에는 뭐 불알친구다 뭐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싸대기 막 때리면서 좀 괴롭히긴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여기서 전화만 받았어요. 은행에서 재직 확인하는 전화 오면 있다고만 얘기해 줘요.”

그 형님은 여기 오시나요?

“아뇨, 어디 지방 간다 했거든요. 연락 안 돼요. 지금은 여기로 걸려오는 전화도 없고.”

혹시... 그분 팔뚝에 문신 크게 있죠?

“어? 저희 형님 아세요?”



실종 신고는 여성청소년계 담당 형사가 나름 친절히 받아주었다. 대화의 시작 때 건넨 방송국 명함이 그 순간에도 유용했다.

“사실 가출일 수도 있어요. 95프로는 그렇거든요. 우리 피디님 말마따나 지능이 좀 떨어진다 해도 어차피 성인이잖아.”

삐쩍 말라 보이던 그 형사는, 본인은 지능팀 출신인데 놓친 사기꾼이 거의 없노라며 쓸모없는 이야기도 길게 늘어놓았다. 신고인을 응대하는 자아와 방송국 피디를 접대하려는 그것이 왔다 갔다 하는 해리장애를 눈앞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힘겹게 말을 끊고는 승주는 그간 직접 알아낸 내용을 바탕으로, 형의 곁에 위협적인 누군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말라깽이는 귀찮은 일이 늘었다는 투로 연신 한숨처럼 느껴지는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 이거 봐요, ‘실종 아동 등 및 가출인 업무처리 규칙 16조’. 가출인 본인이 거부하면 우리는 그 사람 소재를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통보할 수가 없어.”

말씀 잘하셨네요, 15조 보면 ‘신고를 접수한 경찰관은 범죄와 관련 여부를 확인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

이게 저희 형이 혼자서 할 만한 사이즈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그건 형사과 일이라, 우리도 사이즈가 커진다니까?”

승주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것처럼 보였던 말라깽이는 최근에 비슷한 유형의 범죄가 성행한다며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정신이 멀쩡하지 않으면 ‘유인’과 ‘약취’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며 성규 일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밑밥을 깔았다. 거기에다 노숙자 등치고 벼룩 피 빨아먹는 새끼들이 제일 악질이라는 품평까지 곁들였는데, 승주는 형사의 자가당착이 묘하게 우스웠다.

“그래서 차라리 강력사건이 깔끔하다니까. 막말로 동생이랑 같이 사는 거 답답해서 나간 거라 하면, 우리가 뭐, 어떻게 해요?”

캐릭터 독특하네. 차라리 강력사건이면 명쾌하다니, 나를 안심시키려는 건가, 걱정시키려는 건가. 이게 방송에 그대로 나가는 싱크라면, 너는 옷 벗어야 돼.



<오해의 동물원>이라니.

승주가 실종신고를 하고 5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느지막이 사무실에 출근해 확인하니 국장이 보낸 전체 메일이 와 있었다. 지난번 기획안 공모의 결과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반기마다 진행하고 있는 ‘교양제작국 기획안 공모’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연공서열 안 가리고 공정하게 주겠다는 연례행사였다. 그 해의 에이스가 된다는 명예에다, 2백만 원어치의 상품권이 주어지는 부상도 있었다.

올해 상반기의 그랑프리는 민이었다. 이대로라면 민은 곧 <애니멀 라이프>를 떠나 오롯이 혼자 영광을 누리는 성을 쌓게 되리라.

그가 그런 기획안을 제출했다는 걸 승주는 눈치도 채지 못했었다. <오해의 동물원>이라는 제목이라니. 국장이 간략히 설명해 놓은 그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는 더 가관이었다. ‘의외로 잘못 알려진 동물의 상식을 바로 잡고, 그 테마에 현대인들이 많이 찾는 교양 심리학 서적을 결합하는 방식’이라 했다. 메일에서는, 민이 그 예시로 ‘나무늘보’와 ‘펭귄’을 들어 프레젠테이션 했던 부분도 아주 참신했다고 덧붙여져 있었다. ‘올드한 느낌의 <애니멀 라이프>를 리뉴얼하고 리모델링할 수 있는 브릴리언트한 케이스’라는, 영어로 점철된 문장과 함께.

너랑 담배 피우고 회의하면서 다 내가 했던 이야기잖아. 이건 내 거잖아.

곧장 민에게 따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승주는 의자에 걸어 놓았던 외투의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찾았다. 지난번 나무늘보 아이템을 끝낸 뒤 가까운 해외로 휴가를 가겠다고 보고를 한 적이 있지만,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켜자, 다섯 통의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애타게 승주를 찾던 이는 다름 아닌 여청계 말라깽이 형사였다.

“피디님, 아무래도 형 찾은 것 같은데?”

긴박했지만 누군가에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갔다.

“여기 형이 다니던 병원이야, 병원. 어딘지는 아시죠?”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집에서 택시로 이삼십 분 거리에 있는 대학 병원이다. 석 달마다 한 번씩 성규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처방전을 받아야 했다. 그 약이 있지 않으면 불규칙하게 발작 증상이 왔다. 그 순간에도 승주는 그렇게 바삐, 멀리 돌아다니던 형이 홀로 병원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폭력과 강압, 유인과 약취의 현장에서 가해자가 형에게 일말의 동정심 따위를 느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조금이나마 더 뽑아먹으려면 최대한 건강한 숙주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형이랑 같이 온 사람이 있지 않던가요?

“있기는 개뿔. 서에 데려갈 테니까. 와서 얘기해요.”



일 년 가까운 시간만이다. 형이 눈앞에 있다.

여청계 사무실에서 만난 성규는 승주가 생각했던 것보다 멀끔했다. 어디선가 감금된 채 지낸 거지꼴을 마주하게 될까 잠시 걱정했지만, 예상외의 모습이었다. 과거 그의 옷보다 조금씩 더 비싸 보이는 낯선 스타일을 입고 있었다. 쇳덩이 로고가 도드라지는 벨트는 누가 봐도 짝퉁 같았지만, 성규가 그걸 하고 있다는 건 본인이 분명 진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성규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위기로 감지하고는 동생의 눈을 계속 피하고 있었다.

“아, 씨발. 핸드폰 값만 좀 니가 내줬으면 좋겠는데.”

형, 도대체 그 얘기를 몇 번째 하는 거야.

성규는 계속 휴대전화 미납 요금 얘기만을 반복했다. 자동차 캐피털의 연체 대금과 대부 업체에서 빌려 쓴 큰돈은 그의 체감에 없는 것 같았다.

“걔랑 같이 그냥 논 거야. 자꾸 여기 경찰님들이 걔 물어보는데, 나 이용당한 거 아니라고.”

집은 왜 나갔는데?

“너랑 같이 사는 거 짜증 나서, 왜? 집에 허구한 날 늦게 오니까 자꾸 깨잖아, 씨발. 늦게 까지 일하는 게 뭐 벼슬이야?”

그렇게 조금씩 동생의 시간외수당이 쌓여 생활비 벌고 용돈 주는 거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승주는 바로 포기했다. 형은 늘 이런 식이었지. 욕구에 충만한 삶, 그리고 주변에서 무엇을 하며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 주는지는 관심도 없는 삶.

“처음에 몇 대 맞긴 했는데, 찜질방도 같이 다니면서 잘해줬다고. 내가 찜질방에서 자다가 오줌 싼 것도 걔가 다 치워줬어. 돈 가져다준 건 맞아. 근데 같이 사업하자고 했는데 잘 안 됐던 것뿐이야. 룸살롱도 데려가 주고, 가끔 용돈 하라고 걔가 50만 원씩 주기도 했어. 몇 달 지내보니까 좋은 애였다니까. 신고 같은 거 하지 마. 내가 갚을게. 신고하면 나 강간죄로 걸리잖아? 간통죄인가? 걔는 잘못 없다니까, 병신 새끼야. 니가 언제는 형 여자 소개 시켜 준 적 있냐?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이 새끼가. 대학 나오면 다야? 전문대 나오면 다야?”

마음속, 머릿속 분노가 온갖 살점을 뜯어내고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올 법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큰 소리로 형에게 고함을 치는 것은 승주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문대 아니라고 이 병신 새끼야, 명문대라고 몇 번을 얘기해!



시간은 어느덧 밤 열한 시를 넘기고 있었다. 승주가 세연과 함께 나눠 마신 소주는 벌써 여섯 병째였다. 과음의 시작은, 집에서 낮술 한 잔만 하자는 그의 제안부터였다. 세연도 잘 알고 있던 민에 대한 하소연은, 그날따라 격하게 들렸다.

그 새끼 안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회사에 한 트럭이야.

사실 승주도 기획안을 제출했었다. 그의 것이 간택되지는 못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본인의 아이디어가 당선이 된 거니, 상품권이라도 줘야 하지 않냐는 얘기를 취기에 뱉어내고 있었다. 겸손하게 생각을 하려 해 봐도 자신의 기획안이 더 낫다는 자랑과, 당선된 것에 실험적인 요소라곤 전혀 없다는 비난까지. 그 답지 않게 목소리도 커졌다. 꾹꾹 눌러 담았던 불만 이 목구멍으로 한꺼번에 역류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칼춤 춰가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바꿔야 할까? 여기서 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욕을 먹어가며 그래야 하지? 네가 내 입장이라면 어떻겠냐고.

지금의 남자친구가 본래의 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또, 계속 그가 이럴 수 있다는 걸 생각하자 세연은 그가 순간 혐오스러웠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빈 술잔을 세게 내려쳤다.

“너... 내가 한 마디만 해도 돼?”

…….

“유배고 뭐고 언제까지 그렇게 남 탓만 할 건데?”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머리로는 열심히 대답할 내용을 찾고 있었지만, 그보다 앞서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도착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술잔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팔짱을 풀고 의자를 당기며 시간을 벌려 노력했지만, 꺼낼 수 있는 문장이라는 게 없었다.

남보다 위에 있더라도, 그것을 내세워 아래를 불행하게 만들진 않으리라는 명제가 그를 추동시켜 왔던 제일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매 순간 착해 보이려 하면 할수록 스스로는 점점 무능해졌다.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도 존재감이 생기기 쉽지 않은 사원들의 정글에서 그는 아주 쉽게 밀려났다. 도덕적인 우위 정도는 점했을 거라고 스스로 안도했다. 이건 원치 않았던 좌천이니, 이곳은 내가 있을만한 터전이 아니라고 현실을 계속 밀어내기 바빴다. 세연의 말마따나 그건 패자들의 전형적인 정신 승리였고 자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노조에서 한 해를 보내더라도 전투력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감, 지금은 비록 이곳에서 바닥을 기고는 있지만 그간 죽어나갔던 사체들과는 달리 언젠가는 멋지게 걸어 나갈 거라는 청사진, 아직 본인의 값어치가 내리막을 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음을 승주는 단번에 깨달았다.

그는 말없이 세연을 잡아끌며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섹스는 그들이 분위기를 바꾸는 가장 확실하고 편한 방법이었다. 몇 차례 저항하던 세연은 쉬이 체념하고는, 승주의 손과 눈에 응하는 것이 그를 달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는 그의 허리띠를 직접 풀어주었다.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규가 더러운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고 있었다. 세연의 구두가 성규의 발에 차여 또각대었다. 승주는 옷을 도로 추켜올렸고, 세연은 이유 없이 숨을 참았다.

저 개새끼를...

세연이 조용히 집을 떠난 뒤, 성주는 침대에 맥없이 누웠다.

맞아, 사실은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지. 시끄럽고 껄끄러운 갈등으로부터, 그리고 치열함이 주는 긴장으로부터.

그때 주머니 속의 진동이 승주를 침잠으로부터 꺼내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가 찍힌 휴대전화는 성을 내며 울려댔다. 이 늦은 밤에, 발신인은 이번에도 성규를 아는지, 성규가 옆에 있는지를 물었다. 세상살이의 치열함과 껄끄러움을 모두 회피한 불한당은 비상연락처에 동생의 번호를 남기며 돈을 써댔다. 승주는 욕을 뱉어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으며 친절히 전화를 끊었다.

참, 둘도 없는 형제답네, 형제다워.

누가 먼저 꺼낼까 봐 두려운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워냈지만, 이상하게도 형에 대한 분노는 점점 커져만 갔다. 초점 없이 휴대전화를 쳐다보며 페이스북의 스크롤을 긁다 보니 노동조합 전임자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 보였다. ‘투쟁! 함께 한 동지들과의 오붓한 저녁’이라는 짧은 일기가 낯설어 한참을 보고 있었다.

씨발, 그래도 차라리 이때가 나았어.

휴대전화를 던지고는 눈을 감았으나 술기운에 세상이 돌고 있었다. 승주는 갑작스레 방송에 나왔던 원숭이를 떠올렸다. 어디선가 탈출해서 북한산 등산객들에게 발견되었던, 그들이 던져주던 음식으로 연명하다 은혜도 모르고 사람들을 공격하던 그 원숭이. 위험천만한 족두리봉에서 절벽으로 날뛰며 구조를 피하다가, 엽사의 마취 총에 겨우 포획되었던 석 달 전의 ‘히말라야 원숭이’ 말이다. 그 짐승새끼가 불쌍해 전화를 걸어온 착한 제보자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그리고 발견되기 전에 어디선가 굴러 떨어져 죽어버렸다면 구하는 과정에서 다치고 고생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며 오히려 이 땅에 행복의 총량이 커졌을 것이다... 그 빌어먹을 원숭이는 누가 봐도 성규와 똑 닮았다.

족두리봉... 험하고 위험한 산, 위험한 봉우리. 실족해서 누군가 굴러 떨어져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지 않을까.



결국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일억 팔천 정도 하는 그 빌어먹을 채무 때문에.

“약간 공돈 생긴 기분이기도 하고 그러네.”

이삿짐을 나르는 인부들 사이에서 거치적거리며 핸드폰 게임을 하다 성규는 그렇게 말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간 뒤 빚을 갚고 나자 약간의 돈이 남았다. 그 돈을 성규는 공돈이라 얘기하며 히죽대었다.

검색은 막내 작가들의 노트북으로 하자. 프린트 때문에 잠시 쓰겠다면서 커피 쿠폰 몇 장 던져주면 자연스럽겠지.

촘촘한 액션 플랜은 삼 일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말라깽이 형사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던 날이었다. 본론인즉슨 성규가 기억하는 정보도 부족하거니와 꼭 잡아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다는 성규 본인의 의지도 없기에, 팔뚝에 문신 있는 그 남자를 찾는 작업은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북한산에서 가장 위험한, 그래서 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봉우리를 찾아 형과 함께 등산을 가는 것이 승주의 계획이었다. 위험, 추락사 같은 검색어로 기사를 찾아보자. 적어도 본인의 컴퓨터에서는 사고와 관련된 검색기록은 없어야 했다. 질문지와 스토리라인을 잘 짜서, 가는 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형의 인터뷰를 블랙박스에 최대한 남기는 계획도 포함되었다. 형사에게 전화를 할 때의 감정도 결정해야 했다. 울까, 아니면 건조하게 얘기할까. 어떤 것이 맥락상 더 자연스러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동생에게 너무 미안해하던 형이 몸을 아래로 던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I got a soul, But I'm not a soldier 제게 영혼은 있지만 맞서 싸울 힘은 없어요

While everyone's lost, The battle is won 모두가 패배해야만 전쟁은 승리로 끝나죠

모든 짐이 빠져나간 본인의 방 안에서, 승주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다리차를 타고 박스들이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승주는 조용히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차라리 이렇게 된 게 잘되었다 싶었다. 볼륨을 가장 크게 하고 귀가 울릴 정도로 노래를 틀자, 담배연기 뒤 풍경이 꼭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끝>




2019.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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