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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iO Oct 13. 2022

나 바라보기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

-나의 성장 과정들-


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다.

1남 3녀 중 막내인 나는 맏이인 오빠와의 나이 차이가 딱 십 년이다. 그러니 부모님과 세대 차이는 더 심했고 교회에 다니는 것과 신앙심이 전부였던 엄마는 굉장히 엄격하셨다. 거기에 경찰 공무원이셨던 아빠는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두 분 다 40년대 아주 초반에 태어나셨으니 어릴 적 전쟁을 겪었던 세대이시기도 했고 그렇게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시고 나니 부모님에게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굶지 않고 먹고사는 삶' 그 자체가 전부이셨을 것이다. 자식들과 부모 간에 있어서도 함께 뭔가를 대화하고 잘 소통하는 교육은 그냥 사치였다. 매일매일 먹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전쟁이었고 엄마에게는 사 남매를 안 굶기고 헐벗지 않게 키우고 본인이 못다 한 한 맺힌 교육을 자식들에게는 꼭 시키겠다는 의지가 전부인 듯했다. 거기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살았으니 얼마나 바쁘고 힘드셨을까. 그러니 집안에서 가장 어렸던 나에게 어른들은 어리광 따위 부릴 수 없는 항상 엄격한 존재였고 요즘 부모 자녀 세대와는 다른 뭔가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게 자랐으니 중 고등학교 때까지 딱히 그냥 말썽 안 부리고 무난하고 착하게 살았던 것 같다. 청소년기에도 빗나가거나 말썽을 크게 부린 자식들은 아무도 없었다. 폭력을 쓰신 것도 딱히 아닌데 사춘기니 뭐니 하면서 부모님께 짜증을 내거나 어긋난다는 건 상상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중에 자라서 보니 그 시기에 이성친구도 사귀고 술도 마시고 했다는 친구들도 많은데 음... 우리 가정에서는 뭔가 사람들이 말하는 착한 자녀들의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을 경우, 부모님의 실망과 그 반응이 상상이 안 간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내가 대학을 가게 되었고 신입생 환영회 때 있었던 일이다. 대학 선배들과 후배들이 함께 술자리를 가졌고 나중에는 돌아가면서 한 잔씩 거의 강제적으로 마시기를 했다. 같이 마실 땐 그럭저럭 피했는데 막상 내 차례가 되어서 마셔야 하니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마치 사약을 마시라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웠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고 집에 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고 그때만 해도 크리스천이 술을 마시면 지옥에 갈 것 같은 죄책감까지 들었다.(아니 사실 정말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옆에 앉은 내 단짝 친구가 흑기사가 되어서 계속 마셔주었고 그날 친구는 거의 반실신 상태가 되어 버렸다. 거의 반기절한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얼마나 미안했던지 모른다.

요즘 일 마치고 밤에 혼자 아님 남편과 와인 한 잔 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게 얼마나 행복한데 지금 생각하면 피시식 웃음이 난다.


-날개-

안 보이지만 정해진 룰에 따라 착한 우리 언니들과 오빠와는  달리 좀 생각이 달랐던 난 그 집이라는 울타리가 나 자신도 모르게 답답해했던 것 같다. 난 기억이 안 나지만 어릴 때 큰 언니한테 종종 이런 말을 했다곤 했다.

"언니, 난 크면 전 세계를 다 돌아다니면서 살 거야" 


어릴 때부터 내 겨드랑이 사이에 아주 작은 날개가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가지지 않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비밀스럽게 준 선물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작지만 크면 날개도 커질 테니 그때는 그 날개를 펼쳐보고 싶다는 상상을 종종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난 그냥 그런 아이였다.

가정에서는 내성적이고 착한 아이고 항상 조용한 캐릭터로 만들어지고 자랐다. 하지만 나의 내면은 달랐다. 도전하기를 좋아하고 한 곳에서만 계속 살아가는 삶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보다 거기를 벗어나 모험하기를 좋아했던 아이였던 것이다.


그 날개는 대학 1학년 말 처음으로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의 설레었던 가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 나이 만 19세. 이제 곧 20살을 앞두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 공지가 붙었고 그때 우리 대학과 자매대학을 맺었던 일본 대학에서 자매대학 10주년 기념으로 10명의 학생에게 일본으로 교환장학생으로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매 해 한두 명의 선배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난 이 때다 싶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막 가슴이 설레고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당장 교수님께 달려가 어떻게 하면 유학을 갈 수 있나 물었고 교수님은 보통 대학 3학년 학생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했다. 그 해 10명이나 뽑는데 3학년한테만 기회가 가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냐고 나도 이제 곧 2학년으로 올라가니 2학년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부탁을 했다.  교수님은 기말고사 성적으로 2학년한테도 한 두 명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난 그 이후로 죽어라 공부를 해서 1학년 기말성적 1등을 따 내었다. 그렇게 대학 2학년이 시작하던 해, 난 선배들과 함께 일본 교환 장학생으로 뽑혀서 장학금을 꽤나 받고 일본 나고야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내가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때 일본에서 만난 영국에서 온 남자 친구가 내 남편이 되어 있고 난 지금 영국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과 결혼을 한 나의 삶은 어릴 적 내가 10대까지 살았던 나의 가정환경과는 너무나도 달랐고 나의 숨겨진 나만의 날개를 훨훨 펼치기에도 너무나도 완벽했다.  


물론 외국이라는 곳에서 이방인으로의 삶이 외로울 때도 많다. 한국 가족도 친구도 한국 음식도 항상 그리워하면서 20년을 살아도 여기서는 이방인 일 뿐이다.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는다.


집안, 사회인식, 종교, 관습, 문화 등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점점 자라만 나는 내 날개를 펼칠 수 없었다면 난 병들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 그 울타리 안의 정감이 좋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 더 힘든 사람들도 많다.


어느 날 큰 언니가 말했다.

어릴 때 전 세계를 다 돌아다니면서 산다더니 정말 그렇게 살고 있구나. 지나고 나서 보니 정말 그랬다. 어릴적 일본 유학을 시작으로 영국에서 살면서 가족들과 함께 한 여행뿐만 아니라 난 기회가 되면 혼자, 아니면 지인과 스페인 자유 여행을 떠났고 프랑스, 스위스,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등 여기저기 여행을 갔었다. 지인이 함께 여행하자고 하니 핑계로 갈 때도 있었지만 사실 누군가 함께 여행하는 것 자체는 별로 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여행을 가기 위한 핑계일 뿐 혼자여도 난 전혀 외롭지 않았다. 솔직히 차라리 혼자 하는 여행이 더 자유롭고 좋기도 했다. 돈이 아주 넉넉해서 간 것도 아니다. 아이들과 남편의 상황만 허락한다면 그냥 배낭 하나만 매고 길거리 빵만 먹고 다녀도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영국에서 사는 하나의 장점은 근처 유럽에 가는 비행기가 단 돈 몇만 원이라는 점이다.


그냥 난 언니 오빠들과 다를 뿐이었다.

20년을 영국에서 살고 나니 이제 아이들도 성장을 다 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아이들이 본인들의 날개를 펼쳐 훨훨 날아가고 싶어 하고 있다. 내 자식이 아니랄까 봐 우리 아이들도 꽤나 울타리를 싫어한다. 나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날아갔듯이 이제는 내가 보내주어야 할 때 같다.


아이들이 떠나면 이제 꽤나 낡아버린 나의 날개를 펼쳐 어디로 날아갈까. 한국으로 다시 날아갈까. 한국은 나의 선택 없이 내가 태어난 곳, 그리고 아이들의 모국어를 위해 몇 년간 거주한 곳이다. 한 번도 내가 원해서 선택한 적은 없었고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울타리는 존재하지 않으니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요즈음엔 남편과의 대화도 항상 이런 얘기뿐이다. 


슬슬 겨드랑이가 가려워 온다.
아이들이라는 존재 때문에
오랫동안 날지 못한 나의 날개를 닦으면서
요즘은 생각에 깊이 잠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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