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나다운 모습으로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인연>-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났던 것이 스물한 살 때였다. 그때 만났던 분을 생각하면 언제나 고마운 마음이며,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스물한 살의 그때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진취적이고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분이었다.
그분은 고등학교 시절에 인도네시아라는 내가 살면서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자랐다. 거기서 국제학교를 나오셨다고 했는데 그 학교에서 외국 친구들과 영어로 생활했던 일들, 인도네시아 길거리에서 나시고렝 볶음밥을 사 먹었던 일들, 등굣길에 기사 아저씨랑 인도네시아어 연습을 했던 일들 등등. 한국에서 살아왔던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모든 것들이 내게는 너무 새로웠고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해 주었다.
가끔은 그분의 외국 친구들이 한국에 놀러 오고는 했었는데 그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안 되는 영어로 이야기를 했던 일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면서 외국 친구들도 한국 친구들처럼 기쁠 때 깔깔대고 슬플 때 눈물 흘리는 새삼 당연하지만 그때는 신기했던 사실들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 분과 그분의 외국 친구들을 만났었기 때문에 향후에 호주 워홀도 가고 여행도 떠났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그분께 너무 고마운 마음이 남는다.
또한 서로를 얽매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서로 응원해 주는 좋은 관계였다. 그렇게 그분 덕분에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아끼는 일이란 정말 행복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개인에게 사용할 때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회사나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면 사회의 질서를 벗어나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처럼 쓰이기 대문이다. 어쩌면 자유라는 단어에 무책임이라는 단어를 전제할 정도로 우리는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어려운 집단주의 문화에 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내가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더라도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는 것을 말하며, 누군가에게 군림하거나 복종하기보다 서로 동등한 인격적인 모습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다만 이 자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다. 서로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하지만, 다른 점은 받아들이고(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과 헌신이 책임감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무책임이 전제된 자유는 '방임'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책임감을 전제하며 서로 자유로운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은 나다운 본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하여 생각할 때 장자의 무용론이 가장 마음에 든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당신 말은 쓸 데가 없소."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를 이야기할 수 있소. 천지가 넓디넓고 크디큰데, 사람이 쓴다고 해봐야 발이 닿는 부분일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발이 딛고 있는 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을 허물어 황천에까지 닿게 해 버리면, 남은 땅인들 사람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 수 있겠소?" -장자, '외물(外物)'
장자는 혜자와의 대화를 통해 쓸모없는 것들을 인생에서 빼버리고 쓸모 있는 것들만 남는다면 그것이 진짜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아니며 인생의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장자는 언제나 쓸모없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점을 초지일관 강조했다.
아마 이 무용론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은 가장 쓸모를 따지지 않는 일이다. 우선 상대방의 마음으로 건너가는 행동 자체가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들어가는 매우 무모한 일이다. 그렇기에 쓸모를 따지고 계산해 본다면 저 너머로 건너가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누군가를 어떤 쓸모로 인해서 좋아할 수도 있다. 다만 그 마음의 출발점이 쓸모였다면 그 사람이 쓸모가 없어졌을 때 좋아하는 마음의 본질이 흔들릴 것이다. 예를 들어 돈과 권력이라는 쓸모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의 본질이 아닌 쓸모를 계속해서 증명해야 하고, 그 쓸모가 없어졌을 때 그 사람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지 계속해서 걱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쓸모를 생각하지 않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다. 누군가가 '그 사람이 왜 좋아?'라고 물었을 때 '모르겠어. 그냥 좋아.'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쓸모를 바라지 않는 오롯한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