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포르투갈행 비행기에서
나는 '킬링타임'을 못한다.
아까운 시간을 의미 없이 죽이는 것은 영 마음이 불편하다.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평은 '내가 평생 보지 않을 영화'라고 읽힌다. 그렇다고 킬링타임이 필요한 시간에 책을 집중해서 읽거나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대신 밀리의 서재로 며칠째 진도가 나가지 않는 고전을 읽거나 예술성이 높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억지로 보며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 그러면서 “나는 쉬면서도 발전하고 있다”라고 되뇐다. 쉬는 날에도 가만히 있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 이미 저번주에 치운 방을 다시 정리한다. 괜히 문틈을 닦고 화장실 청소를 한다. 그러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이게 내가 쉬는 방식인데, 과연 이게 쉬는 게 맞나 싶다.
비행기에서는 마음 편하게 '킬링타임'할 수 있다.
그래서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한다. 진짜 많이 좋아한다. 포르투갈까지 비행시간이 가장 길다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비행시간이 더 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히려 들떴다. 비행기에서는 인터넷이 안되니 뉴스를 보지 않아도 되고 업무나 사회생활을 위한 연락을 받지도 하지도 않아도 된다.
최근 미국 항공사에서는 비행 중에도 무제한 인터넷을 서비스해 준다고 한다. 나는 이 소식에 전혀 설레지 않았다.
물론, 설령 인터넷이 되더라도 비행기에서는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던지 빨래와 설거지를 해야 한다거나 어질러진 옷방을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그 외 인생에 닥친 문제를 당장에 해결할 수도 없다.
비행 중에는 죄책감 없이 '킬링타임' 해도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승무원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밥 먹으라면 밥 먹고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면 된다. 비행기에서 하는 고민은 비빔밥을 먹을지 스테이크를 먹을지, 맥주를 마실지 보드카를 마실지 정도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타국에서의 스트레스 또는 다시 일상이라는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를 20시간, 아니 더 길게도 타고 싶다. 사실 한 1~2년간 우주왕복선이라도 타고 싶다. 좀 맘 놓고 쉬고 싶다. 그래서 나는 아무 걱정도 강박도 없는 비행기 안을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더 이상 비행기 안에서 마음 편하게 '킬링타임' 할 수 없게 됐다.
포르투갈 여행을 결정하고, 열다섯 시간의 비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중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때 영화 평론가인 이동진 작가가 나온 라디오 스타 클립을 보지 않았어야 했다. 이동진의 팬으로서, 그 영상을 클릭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동진 작가는 영화 평론가임에도 비행기에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이동진 작가는 비행 내내 책을 읽는다고 했다. 영화평론가인 그에게 영화를 보는 것이 일이고, 책을 보는 것이 휴식일수도 있겠지만 '비행기에서 책을 볼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핵심이었다. 그동안 비행기에서 독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비행기에서의 독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제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비행기에서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며 허송세월 보낼 수 없었다. 책을 읽을 수도 있는데 허송세월을 보낸 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해서였다.
이젠 비행기에서도 책을 읽어야만 했다. 적어도 책을 들고 타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동시에 비행기 타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고민 끝에 책을 한 권 골랐다.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한강작가의 '소년이 온다'였다. 어차피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이었고, 가장 큰 이슈였기 때문에 궁금했다. 물론 큰 기대는 없었다. 특히 초반 내용이 잔인하고 우울해서 조금만 읽고 덮으려다가 참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몰입했다. 밥 먹을 때도 책을 놓지 못했고, 마침내 마지막장까지 한숨에 읽었다.
책이 읽기 쉽게 쓰이기도 했지만, 비행기의 환경이 한몫했다. 독서실 같은 백색소음과 집중 조명, 약간 불편한 의자와 적당한 높이의 선반 등 비행기는 독서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집중해서 완독했더니 정신이 또렷해지고 개운해졌다.
감히 말하건대, 인생 최고의 독서경험이었다.
책을 한 번에 읽은 적도 이렇게 빨리 읽은 적도 처음이었다. 더 이상 독서할 책이 없어서 아쉬웠던 적도 처음이었다. 개그맨 김영철은 말했다. 불편한 행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운동하고 공부하는 것이 당장은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다음 비행기를 탈 때도 책을 한두 권 챙길 계획이다. 당장 마음은 불편해도 이것이 결국 더 행복한 비행 경험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강박이 이렇게 신선한 경험을 주기도 하는구나.
아,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파트, 동호 어머니의 파트에서는 눈물이 너무 나서 다음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독서하며 이렇게 오열한 경험도 또 처음이었다. (이번 독서에서 처음 경험한 것이 많다.)
다음 연재부터 본격적인 포르투갈 여행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