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암혹하던 시절에도 축제가 열였다. 다들 강의실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강의는 휴강이었고 학교 광장에서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풀밭에 동그랗게 모여 앉은 아이들도 있었다. 학과에서는 주막을 열어 대학원 선배님들과 교수님들에게 막걸리와 파전을 만들어서 팔았다. 오후가 되자 준비된 무대에는 초대 가수들이 와서 노래를 불렀다. 학교는 마치 콘서트장 갔았다.
3일 동안의 축제가 끝나고 다음날 아침 학교 강의실에 가는 길에는 전날의 여흥이 남아 시큼한 막걸리냄새가 났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늘 그랬듯이 수업이 시작되면 총학생회에서 틀어놓은 데모가가 강의실까지 울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 소리가 싫다거나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다.
공강 시간이면 나는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며 복도에서 학교 광장을 내려다 보았다. 과친구를 비롯한 학생들이 모여 데모가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데모가를 부르며 돌아다니던 학생들은 학생회관 앞에 모여 마이크를 잡고 하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는 지푸라기를 묶어만든 형상에 불을 붙였다. 그것은 화형식이었다. 그 당시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몰랐던 나는 겪하게 분노하며 부르던 학생들의 노래를 같이 부르지 않았다.
87년 가을이 되자 학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수업 거부의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과 친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수업 거부에 대한 투표를 했다. 그때 다들 수업 거부에 찬성을 하고 단 한명의 학생만 반대를 했다. 나는 수업 거부애 찬성표를 던졌다. 거국적인 뜻이 있어서가 어니었다. 다들 수업 거부에 찬성을 하는 것 같아서 나도 찬성을 했다.
수업 시간이 되어도 학생들은 강의실에 들어가지 읺았다. 그리고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에 없다. 모두들 아쉬워하면서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고 종강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데모를 하다가 잡혀갔다. 형을 살게 되었다는 말을 누군가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학생 운동과는 무관하게 흘렀다.
4학년 때였다.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를 했다. 지취방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보니 필요한 책이 없었다. 학교 사물함에 책을 두고 온 생각이 났다. 학교에 가야 겠다고 밖을 나와 교문앞에 다다르니 학교 앞에는 정경들이 무장을 하고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화염병과 짱돌을 들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