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아마 우리는 아닐 거야
이별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랑은 취미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취미가 이별인 사람은 세상에 있을까 싶다.
내 생에 얼마나 많은 이별이 남아있을지가 무서워서 남은 삶이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걸 뼈저리게 실감한 게 너와의 이별이었다. 너와의 이별은 마치 살아있는 채로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이별이었다. 내가 도마 위에서 손질당하고 있는 생선이 된 것 같은 이별. 내 경우에는 생선보다 못하다고 느꼈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한 건지, 무엇을 위한 건지도 모르고 목부터 잘려나가는 것 같아 더더더 억울한 생이별이었다. 이 이별을 통해 나는 앞으로 내 인생에 남은 사랑의 순간들보다 결국에는 그 사랑들과 언젠가의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가끔은 그 이별이 아주 갑작스럽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이별이 무서운 또 다른 이유는 또 다른 시작이 바로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이별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삶.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 이별이라는 현상이 벌어지자마자 우리는 그 상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심지어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다음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이별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늘 그래왔었다. 이별을 피할 수가 없는데 심지어 그다음도 피할 수가 없다. 그 사실이 이별의 잔인함과 가혹함을 증명해 주었다.
이별, 겪으면 겪을수록 이름만 반짝한 너는 그 자체로 아주 모질고 혹독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내가 이곳 제주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왔다. 6개월간 이곳 제주에서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가졌다. 내 인생 제일의 사랑인 너를 잃고 난 후, 사랑도 삶에도 큰 의미를 찾기 어려웠던 내가 이곳 제주에 오고서는 아직도 작고 고른 숨을 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짠하게도 조금 더 빼꼼하고 싶고, 조금 더 내달려보고 싶은 내 꿈이 아직 내 안에 있었다. 아직도 더 많이 새로움과 마주하고 싶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싶고, 달콤한 희망을 알록달록하게 그리고 싶음에 목말라하는 내가 여전히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 제주는 숭숭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있는 나를 본인의 자랑인 바람과 파도와 노을빛으로 채워주었고, 다 시들어 이곳에 온 나라는 식물에게 죽지 마라고 단비 같은 물을 채워 주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곳에서 지내기를 결심하고 나는 한 가지 더 결심한 것이 있었다. '사랑'이란 이름처럼 무엇이든 사랑하자고, 사랑하자고 마음먹은 사람만큼 대단한 사람도 없을 거라면서. 내게 그런 힘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제주에 오는 순간의 내 결심이었다. 내 결심만큼 내가 사랑에 최선을 다했는지, 열심이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할 수 있는걸, 하고 싶은 걸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의 끝에 이렇게 몇 편의 글도 남겼으니 그것만 해도 나는 만족스럽다.
내 마음의 근육을 길러준 이곳 제주와의 이별이 곧 코앞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끝이 있는 시작이었고 너무나도 약속되어 있던 이별이었기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이별이란 건 늘 그렇듯 무척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진다.
동생아. 내 말마따나 제주와의 이별은 결국 육지와의 새로운 시작인 거잖아. 그런데 언니는 조금 막막해. 이별을 앞둔 지금의 마음이 착잡하고, 벌써부터 이곳이 그립고, 어깨가 축축 처지는 게 제주앓이가 한동안 오래될 것 같은 기분이야. 이별에 미숙한 나를 알기에 나는 이미 한 달 전부터 나름의 이별을 준비해 왔는데도 이 쓸쓸한 마음을 다루기엔 역부족인가 봐. 함께 지내며 고마웠던 동료들의 선물을 사고 편지를 적으며 씁쓸한 마음을 달래 본다. 그리고 그걸로도 부족하니 이렇게 터놓으며 곧 완전하게 닥칠 이별의 순간을 준비해 본다.
준비한 이별과 준비하지 못한 이별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언니는 너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이별은 그다음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도 이전에 경험해서 잘 알고 있다. 결국은 무슨 일이든 내게 벌어진 일들을 내가 어떻게 쓰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알고 있는 걸 실천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지만.
이왕에 해야 할 이별이라면 잘 하자, 후회 없이 하자라는 생각이 내가 하던 이별들의 전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잘한 이별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래, 후회 없게 하자. 후회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
예전에 외국에서 지내는 나를 만나러 네가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적이 있었다. 나는 오랜 외국생활에 가족들이 너무 그리웠었던 때였고 그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주어서 우리는 너무 재밌는 추억들을 쌓았다. 네가 더 오래 있었으면, 실은 아예 돌아가지 않았으면 했지만 너는 당연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이별 역시 너무나도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었지만 나는 그 이별이라는 것에 늘 초점이 지나치게 맞춰지는 사람이라 그 헤어짐 자체가 속상하고 슬펐다. 너는 돌아가고 나 혼자 다시 남겨지는 것이 평상시보다 더 외롭게 느껴졌다. 나는 심술이 잔뜩 나서 너는 언니를 두고 가는 게 슬프지도 않냐고, 헤어짐이 아쉽지도 않냐며 투덜댔다. 너는 '당연히 아쉽지만 내가 가도 곧 언니는 잠깐 슬프겠지만 잘 지낼 거야'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헤어져야 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다고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어떠한 부분에선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그러고 난 후 내 집에서 정말 떠나는 날, 너는 집 이곳저곳에 작별인사를 건넸다. 부엌의 탁자에도, 세탁기에도, 화장실에도, 내 침대에도, 피아노에도, 거실에도, 저 멀리 한국과는 다른 생경한 풍경에도. 안녕. 안녕. 안녕. 이별의 순간을 생각할 때 언니는 너의 이 작별인사들이 떠오른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제주에 올래?라고 물어보면 무조건 다시 올 거라는 것.
마치 다시 너의 언니 할래?라고 물어보면 무조건 그럴 거라는 것처럼.
제주는 상처투성이였던 나에게 연고 같던,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안 믿던 나를 하루하루 아물게 해 주던 곳.
너도 왔다면 참 좋아했을 곳. 나를 자랑스러워했을 곳. 우리 스스로도 부러울만한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을 곳. 덕분에 나 너무 잘 지냈어. 폭싹 속았수다. 촘말로 고맙수다. 나 이녁 소못 소랑햄수다. 고마워,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