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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소리 Sep 09. 2024

인생은 선택, 가끔은 고집이 필요하다.

24살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게 되어 집을 떠나 살다 보니 오랜만에 집에 가면 많이 변해있는 곳이 있고, 전혀 변하지 않은 곳도 있다. 물론 친구들은 다들 가정을 꾸리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래도 가장 친한 친구들 몇몇은 얼굴을 보면서 지낸다. 4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하는 짓은 똑같다.

생각해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생각은 다르지 않고 몸만 늙고 커졌다.

대전에 있는 내가 살던 집은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닌 부모님 집이 되어 버렸다.

군 생활을 했고, 가정을 꾸렸고, 두 아이에 아빠가 되었다.

지극히 평범한 게 행복이라 여기며 살았지만 그간에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내 주변에 많은 일들을 겪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게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어릴 때부터 항상 튀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키가 좀 크고 외향적인 성격 탓에 눈에 잘 띄는 사람이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붕괴되면서 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 학구위배자로 통보받아 주소지에 있는 학교로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되었었다. 이사하기 전에 다니던 학교를 이사하고도 다녔었는데 저 사고가 있고 나서는 뜻하지 않게 전학을 갔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교실에 갔을 때는 씨름부였던 친구와 시비가 돼서 첫날부터 싸웠었다. 나도 키가 큰 편이었으나 그 친구는 나보다 더 키가 컸었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었는데 나는 44번이었고 그 친구는 45번이었다. 지금도 고향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술안주가 돼서 하는 이야기다. 중학교에 처음 입학해서 싸우게 된 친구가 씨름부였고 나보다 키가 컸으며 같이 올라간 친구들이 기대반 걱정반인 상태로 싸움이 되었는데 다행히 내가 이긴 싸움이 됐다. 그때 당시 남자들의 싸움은 누가 깡이 좋냐 정도의 승부로 나뉘었던 것 같다. 그 사건으로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학교에 불량서클에 어울리게 될뻔했다. 그때 당시에는 조폭(?) 생활을 할 인원을 조기에 뽑을 목적으로 스카우트이란 표현을 통해 친구들을 많이 뽑아 갔었다. 그들의 학교생활은 마친 어린 친구들이 조폭들을 흉내 내듯 인사를 하고 생활을 하며 잦은 싸움을 했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깡도 없었고 그렇게 선배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그런 생활을 하게 되었더라면 지금의 생활을 어땠을까? 가끔 돌이켜 생각을 해도 인생을 크게 좌우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몇 년 전 그렇게 어울리다가 성장한 친구의 결혼식을 갔었었는데 군인보다 줄을 잘 맞춰 결혼식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인사는 아주 예의 바르게 깎듯이 했으며 옷 입는 스타일도 다들 비슷했다. 헤어스타일과 말투도 비슷했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에도 원하지 않게 튀다 보니 고등학교 때에는 멀리 학교를 지원해서 갔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 탓에 어쩌면 빗나가지 않고 그래도 평범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중3 때는 전단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고1 때는 막노동도 해보고 택배알바도 해보면서 인생을 많이 배웠기 때문이다.

대학교에서는 체육학부로 진학하게 되어 일종의 '집합'문화가 있었다. 얼차려를 주는 선배들이 많이 무서웠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아르바이트가 꼭 필요해서 아웃사이더로 지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었다. 나는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업 걱정이 없어 학교 생활에 큰 의미는 없었고 조용히 졸업만 잘해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학교 모임에는 꼭 필요한 것만 하고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었다.

많은 동기생들이 군대에 가게 되다 보니 내가 3학년 때 학생회장을 하게 되었다. 체육학부에서 학생회장을 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무서운 선배들도 있었지만 무서운 후배들도 있었다. 나는 경호비서학과를 전공하여 전국에 태권도, 유도, 합기도, 검도 등 나름 운동을 했었던 친구들이 왔었다. 그래서 무서운 후배들도 많았다. 그래도 나름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3학년 때 학생회장을 하고 4학년 때 연임을 하게 되어 대학교 생활에 2년을 학생회장을 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군대에 입대해서 처음 체력검정을 했는데 120명 중에 117등으로 통과했었다.

그때 당시에는 몸무게도 많이 나가고 운동을 하다가 쉬면서 처음 시험 볼 때는 특급으로 통과를 했었는데 졸업하고 입대해서 처음 보는 체력검정은 최악이었다. 내 뒤에 앰뷸런스가 같이 따라왔었다. 그때 충격을 받고 다이어트를 해서 30kg를 감량하고 2번째 시험을 봤을 때는 상위권으로 체력검정을 통과했었다. 밥을 반만 먹었고 국을 먹지 않았으며 부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 하루종일 배가 고픈상태를 유지하면서 30kg을 지독하게 뺐었다. 체력검정 117등의 창피함을 극복하고자 나름 피나는 노력을 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평범함을 원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었나 보다. 뭐 하는 쉬운 것도 없었고 편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들처럼 사회에 한 구성원으로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려움을 겪는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고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에  공무원인 아내와 초등학생인 큰아들(아빠를 닮지 않아서 공부를 잘한다.) 그리고 두 살이 된 딸, 4 식구가 평범하게 산다. 주말이면 가끔 영화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1년에 한 번 정도는 해외여행을 가고자 하며

역 시즌으로 옷을 사면서 좋은 옷을 사고자 한다. 유행이 갓 지난 옷은 큰 리스크 없이 조금 더 저렴한 값으로 구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항상 옷은 역시즌으로 산다.


처음 직업을 가지면서 세웠던 인생계획 및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이루면서  누구나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면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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