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에피소드 9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욕망하는 한 여자
질서와 평화, 낙원. 10년 후, 나는 반짝거리는 조용한 부엌에서, 딸기와 밀가루가 있는, 그 이미지 속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죽어간다.
에니 아르노의『얼어붙은 여자』
오래전 결혼을 하기로 했다. 바보같이. 지금 돌이켜보면서 '바보같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먼저 튀어나오니 내심 놀란다. 나는 분명, '아내'와 '어머니'가 누구인지(익숙하지만 자신과는 결코 연결 짓지 못했던 허상), 그 평이하고 올곧은 단어가 여자아이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가는지 몰랐다. 결혼에 대단한 열정과 로망을 가지고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인생의 풍요로운 경험이자 의미 있는 변화의 단계일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없지 않았다. '나'라는 고유한 존재 위에 겹겹의 좋은 옷들을 걸치기만 하면 되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럴 리 없지. 원치 않는 옷의 무게들로 나는 점점 더 짓눌려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벗어던지고 싶은 것들이,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다.
원치 않는 옷들에 대해 서서히 알게 된 후로 나의 내면은 투쟁의 터가 되었다. 알 수 없는 존재와 관념들에 맞서 누구를 지키려는지 조차―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그렇다면 비로소 더 크게 자각하게 된 '자신'이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다른 존재는 어떻게 내게서 분리해 내는지, 더 이상 독립적 개체로서의 존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 확신 없이 계속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다. 홀로 하는 싸움이라 더 외로웠다. 세상에는 이미 결혼과 여자에 관한 공고한 무언가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내 질문에 답을 끝내 찾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만 높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일상의 시간은 괴롭고, 즐거웠다가, 아무 변화도 맞이할 수 없지만 순간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의도적 무지의 순간들이 뒤섞여 흘러갔다. 짧은 시간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기나긴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부산물이 내 안에 남았고, 그 잔재를 그러모으자 '그저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읽혔다.
아내이자 어머니로 사는 일은, 진짜 나의 모습일 수는 없는 건가? 없을 것이다. 나는 아내이기를 선택했고, 그로 인해 나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험난한 타협과 상실을 반복하다 덜컥 무서워졌고, 결국 어머니가 되는 것은 선택하지 못했다. 아내, 어머니. 그것은 고유한 개인을 넘어서는 하나의 억압적인 정체성에 가깝다. 가정의 생활을 돌보세요. 그 일의 책임자가 되세요. 그것이 당신의 고유한 역할입니다. 기꺼이 모든 일을 해내세요. 아! 자신보다 함께 사는 이들의 필요를 고려하세요. 이건 필수영역입니다. 나는 해낼 수 없을 것처럼 좌절감이 들기 일쑤 거나 억울함과 분노를 다스리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요리를 하고 가정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돌보고 의미가 크지 않다 생각하는 잡무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것이 때때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 시간이면, 그 아까운 시간에, 내 미래를 고민하고 미뤄두었던 책을 집중해 읽고 새로운 결과물이나 일을 도모하고 싶었다. 아직도 내게 무엇이 남아있을지...... 헤아려보고 꿈을 짓고 싶었다. 내 안에 있는 이상과 머물러야 하는 현실 간의 거리감이 나를 흔들었고, '자신'으로 우뚝 서지 못한 자의 섣부른 최후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로라 브라운이 되었다. 로라 지엘스키, 지칠 줄 모르는 책벌레였던 고독한 소녀는 사라졌고 이제 그 자리에 로라 브라운이 있다.
한 페이지만, 딱 한 페이지만 더. 그녀는 결정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옷을 갖춰 입고, 머리를 손질하고, 부엌으로 내려가는 일 따위는 여전히 너무 비천해 보이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로라는 자신도 조금은 그런 명민한 기운이 있다는 상상을, 대부분의 사람들도 내심 이와 같은 희망적인 느낌을 작은 주먹처럼 꼭 쥐고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상상을 하는 걸 좋아한다(이는 그녀가 고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중 하나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도 슈퍼마켓 통로 사이로 쇼핑카트를 밀 때나 머리를 손질할 때 어느 정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여기 찬란한 영혼이 있어. 슬픔의 여자, 특출한 여자. 여기보다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만 슈퍼마켓에서 토마토나 고르고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앉아 있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단순하고 기본적이고 어리석은 일상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여자.
마이클 커닝햄의 『디 아워스』
브라운 부인은 남편을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내가 아닌, 어머니가 아닌, '자신'에 대해 욕망했을 뿐이다. 그녀는 말없이 이층의 자기 침대와 책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들이 함께 하는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도망치고, 일상의 행복을 다짐하고, 다시 절망했다. 그녀의 혼란스러움이 절절이 와닿는다.
여자들은, 가정을 돌보기로 마음먹은 바로 그 아내들은 부엌의 개수대에 잠시 기대어, 흐트러진 침구를 펼치며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흐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허공을 응시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되돌아보고 반드시 마지막에는(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암담한 순간이 오기도 한다. 혼자, 자신 만의 인생을 결정하던 그 어느 때인가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어쩌면 지금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가는 중간 즈음의 시절일지 모른다. 한 발짝씩 달라져 우리는 어설프게라도 자신에 대해 탐색하는 시간을 거친다. 그렇다고 그 모든 혼란이 잣아드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나의 어머니를 볼 때 생각했다. 아내와 어머니가 아닌, 그 여자는―가정 안에 종속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 여자가 잘 해냈을 일들과 세상에 주었을 이로움이 떠오른다. 그 여자의 모든 싹을 잘라버렸을 '아내'와 '어머니'가 싫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내 어머니와 어떻게 다른가. 긴 조정 시간이 걸렸다. 말했듯이, 이 기나긴 조정의 시간은 '자신'으로 우뚝 서지 못한 채 아내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이제야 깊이 있게 '자신'만의 삶을 구하고, 그것을 꽈악 움켜쥔 채 가정의 삶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세밀한 걸음을 딛는 중이다. 바라건대, 나보다 더 후에 걸음을 시작한 여자들은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정을, 아이를, 원하지 않고 다른 이상을 좇아도 그 모습 그대로 온전하기를.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을 가장 먼저 구하기를.
하재영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중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원하는 여성이 있다-많다는 것 역시 핵심이 아니다. '그 선택'말고 '다른 선택'이 가능했느냐가 핵심이다.
엄마가 선택한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져온 일을 생각하면 수많은 가정과 질문 들이 떠오른다. 가사노동이라는 '반복의 노동'이자 '필수적 노동'을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만 담당한다면, 그 한 사람이 어머니-아내-며느리로 불리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성역할 모델에 맞춰 경제적, 사회적 자립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와 그녀가 추구하는 자화상이 동떨어져 있다면, 다시 말해 그녀의 노동이 "스스로 원해서" 맡은 일이 아니라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아분열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결국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란 선택권이 없는 자의 자아분열이 아닐까? 현실과 의식이 유리되어 있을 때 그녀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으니 그저 현실에 잡아 먹히지 않는 것, 의식의 깨어남을 억누르거나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