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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Oct 17. 2024

텍스트 에피소드 10

아흔  즈음의 그녀들에게 청해 듣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중을, 아주 나중을, 상상하는 편이다. 결코 가깝다고 할 수도 없는 노년의 어디쯤 같은. 상상해서 뭐 어쩌겠냐마는 지독하게 걱정이 많은 기질 탓이 아닌가 한다. 또 희한스러운 건 미리 열심히 상상하는 그 자체로 애매한 불안이 가라앉기도 한다. 그런 내가 현재 간직한, 노년의 큰 주제 중 하나는 단연코 '아이'다. 일이 어떻고 건강이 어떻고 삶의 의미가 어떻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을 채워가겠다며 느긋하게 구는데,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면 정말 나는 세상에서 혼자인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조바심을 낸달까. 막상 노년에 관한 얘깃거리들을 주섬주섬 읽거나 듣다 보면, 누구나 인생에서 혼자가 되는 시기를 겪게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지, 부모도 배우자도 나와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날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유독 '아이'가 없다면, 노년의 끝자락은 외로움으로 고통스럽고 나는 홀로 막심한 후회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종에 대한 인간의 본능인가요? 잘 모르겠어요―에 종종 시달린다.  


평소 주제나 영역별로 글조각을 이리저리 모으는 나는, 시간차를 거쳐 아흔 즈음의 그녀들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내가 상상하는 나중의, 아주 나중의 이야기를. 남편과 아이도 없이 혼자 살아온 그녀. 30여 년 전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아이는 없는 그녀. 남편을 떠나보냈지만 자식과 손주들이 가득가득한 그녀. 그녀들에게 청해 듣고 싶었다. '아이'없이 산다는 건 어때요, 기나긴 삶의 끝에 다다르면 후회……할까요, 역시 자신의 인생을 함께 누릴 가까운 가족들이 늘어난다는 건 고립과 외로움의 저 멀리 반대편이겠죠. 이번 텍스트 에피소드는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계속해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나아가 그 누군가를 향해서도 솔직해야 한다고, 다그쳐야 했기 때문이다. 때로 글조각들을 모아 놓고 보면, 나의 나약함과 이기심이 읽히고 숨기고 싶은 의도가 엿보이기도 하고 형편없는 뭔가를 들키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아흔 즈음의 그녀들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도 결국 내가 모은 글조각들이라는 게 '아이가 없지만 내 삶은 훌륭했어', '자식과 손주들이 내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지, 나는 나 홀로 충분해', 하는 내 염원이 힌트처럼 담긴 것들이라니. 그녀들의 이야기는 '아이'에 관한 이 협소한 부분에만 멈추어 있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잘게 부서지면서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잔물결들처럼 삶의 곳곳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나마 밝히니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내가 모은, 징글 한 사심이 가득한 이 글조각 또한 누군가에게는 유용한 불빛으로 빛날 언어일지 모른다.


 

첫 번 째 그녀,


다이애너 애실의 『어떻게 늙을까』 중


 이제 늙으니 예전보다는 아기들과 어린아이들에게 훨씬 더 관심이 간다. 실제로 아이들 옆에 있으면 즐겁다. 최근에는 우리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 매우 기뻤다. 그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며 감탄하는 일 말고는 그 아이에게 해줄 일이 아무것도 없어 다행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아이나 손주가 없는 게 정말로 아쉽진 않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쉽긴요, 정말이에요"라는 대답이 나온다. 요즘 내가 보게 되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유망해 보이는 건 내가 그 아이들의 생활에 깊이 개입해 골치 썩을 일이 없고 또 그럴 수도 없기 때문에 부담이 없어서다.


이기심. 바라건대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저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어린아이에게 자신을 내줘야 하는 어머니처럼 나의 온 자아를 내줘야 하는 일이면 경계하게 만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런 고갱이 정도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아이를 잃고도 쉽게 극복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어쨌든 적어도 한 가지 큰 후횟거리는 있는 셈이다. 내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 이기심, 내가 아이가 없는 걸 유감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실히 폭로해 버린 그 이기심말이다.


나,


마흔의 나와 아흔의 나는 많이 다를까? 글쎄, 아흔의 그녀를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나는 조카를 보면 어찌할 줄을 모를 정도로 애정이 샘솟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봐도 그렇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끼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아이'에게 내어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이기심이라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두려움이라 말한다. 조각나는 자아와 나의 영향력을 품은 존재에 대한 것. 두려움이라 부르든 이기심이라 부르든 이것 만은 핵심이다.  


두 번째 그녀,


하시다 스가코의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중


그런데 그녀에게는 좋아하는 일이 없었다.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 뒷바라지만 했다. 일평생 가족에게 헌신하다가 더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져서 혼자가 되어 시간은 남아도는데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줄곧 내게 말했다.

"난 자식이 없는 스가코 씨가 가여워."

나는 무슨 말을 하든 정신승리로 보일 것 같아서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 죽기 전쯤에는 "스가코 씨는 혼자 살 각오가 되어 있어서 좋겠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녀의 최후를 보면 가족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배신감을 느끼며 쓸쓸한 만년을 보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집'이나 '가족'에 인생을 바쳐온 탓에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이 꽤 많은 듯하다.


나,


나의 삶을 재단할 불편한 존재가 없다는 사실은 마음을 놓이게 한다. 누구든 단지 상대방의 존재―가까운 혈연관계라 할지라도― 자체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자식과 자식의 배우자와 그들의 아이를 떠올리면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만이 떠오른다. 아, 상상만으로도 경직되는 기분. 오롯이 혼자의 삶을 꾸린다는 것은 처음의 흔들흔들한 서기 연습을 잘 거쳐두면, 아흔 즈음에는 어쩌면 제법 멋진 일이지 않을까?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단단하고 우렁차게 혼자 서있고 싶어 진다.


 

세 번째 그녀,


베로니크 드 뷔르의 『체리토마토파이』 중


이제 크리스마스도 시들하다. 자식 손주 들은 다 착하다. 다들 크리스마스 휴가를 여기 와서 보내려 하고, 절대로 나 혼자 적적하게 지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자식 손주들을 보면 반갑고 좋다. 하지만 매일같이 정신은 없고, 집은 치우기가 무섭게 어질러지고, 밥 때는 왜 이리 빨리 돌아오는지. 내 주방에 다른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도 싫고, 설거짓거리가 산더미처럼 나오니 식기세척기가 하루 종일 돌아가고, 쓰레기 통은 넘쳐난다. 아이들은 흙투성이 신발로 아무 데나 돌아다니고 더러운 손으로 아무거나 만지고, 딸이 기르는 개는 푸아그라를 자기 사료인 줄 안다. 영양가 없는 대화, 술잔이 오갈수록 커지는 목소리, 사소한 입씨름…… 나는 이런 게 다 피곤하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약간 따로 움직이려고 한다. 아침에는 다른 식구들보다 일찍 일어나 혼자 주방에서 고즈넉하게 아침을 먹는다. 깨끗한 식탁보에서 혼자 조용히 차를 마시고 빵에 버터를 발라 먹는 게 좋다. 애들이 모두 내려오면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 잠시 텔레비전을 본다. 검심을 먹을 때가 되면 벌써 두렵다. 점심은 큰 식탁에서 모두와 함께 먹을 수밖에 없으니까. 나도 대화에 끼려고 노력은 하지만 내 목소리는 그렇게 또랑또랑하지가 않다. 식구들이 모두 한꺼번에 떠들기 시작하면 나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뭐, 내가 말을 한들 걔들이 듣겠는가. "누가 냉장고에서 치즈 꺼내놓았니?"라든가 "오늘 저녁은 호두케이크를 먹을까, 오렌지케이크를 먹을까?" 등 할 말이 있을 때는 조용히 손가락을 든다. 그러면 누군가가 "쉿! 할머니 말씀 하신다."라고 한다. 모두들 동시에 말을 멈추고 나만 바라본다. 그 침묵이 얼마나 기묘한지. 걔들은 환자를 대하듯 내 말에 귀 기울이고 다정하게 대답한 뒤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재잘재잘, 웅성웅성, 금세 또 도떼기시장이 된다. 내 귀에는 스치듯 지나가는 몇 마디, 몇몇 단어가 들려올 뿐이다. 그 말들은 잔 부딪히는 소리, 포크 부딪히는 소리에 겹치고 엉키고 섞여서 의미를 잃고 내 머릿속에서 흐릿해진다. 식탁에서 일어날 즈음이면 이미 정신이 쏙 빠진다. 시각이 너무 늦지 않으면 커피를 마시고 잠시 산책을 하면서 정신을 수습한 뒤 내 방에 올라가서 쉰다. 저녁은 거르고 싶을 때가 많다. 거창한 만찬은 낮의 일거리를 늘리고 나만의 저녁 시간을 앗아간다. 나는 그저 오후 5시쯤 주방에서 고깃국이나 수프 한 그릇, 요구르트나 귤 한 알 정도로 가볍게 때우고 침실로 올라가는 게 좋다. 하지만 내 맘대로 할 수도 없다. 내가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애들이 속상해하니까. 걔들은 내가 늙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각에, 자식 손주 들과 거하게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애들이 상을 치우는 동안 아무에게나 저녁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올라간다. 드디어 혼자 있을 수 있다. 가족들과 부대끼면서 사는 것도 힘들어지는 나이가 있는 모양이다.  


나,

 

의무감과 예의로 유지되는 가족 관계는 얼마든지 있다. 도움과 연민이 필요할 것이라 여겨지는 노년의 시기에는 더할지 모른다. 더 이상 나의 시간이 나만의 시간일 수 없다니. 잘 다듬어진 호혜적 시간과 만남 속에도 불만족은 찌꺼기처럼 남는다. 어차피 관계라는 것은 그런 측면이 있으니까. 언제인가 티브이프로그램에서 본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자신 만의 정원을 홀로 가꾸며 변함없는 하루를 충만하게 보내셨다. 간소하게 손수 밥을 지어먹고 정원일을 하는 몸짓과 표정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평온하던 기억이 난다. 그 장면을 보며, 삶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믿던 나 자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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