純爺(sunya)의 갈색 사유 제6화
안중근의사의 가묘

by 순야 착지

무리를 살린 다리, 텅 비어(空) 가득 찬 평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 중에는 무리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준 '원숭이 왕(마하카피, Mahākapi)'의 일화가 전해진다. 히말라야 숲속, 갠지스강 변의 달콤한 망고를 탐낸 인간 왕의 군대가 원숭이 무리를 포위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원숭이 왕은 강 이쪽과 저쪽의 나무를 자신의 몸으로 연결하여 살아있는 다리가 된다. 8만 마리의 무리가 그의 등을 밟고 무사히 강을 건너는 동안, 마지막 원숭이의 발길질에 등뼈가 부러지는 참담한 고통 속에서도 왕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 한 몸 희생해 무리를 살렸으니 아무런 후회도, 원망도 없다"며 평온하게 눈을 감는 원숭이 왕. 자신을 철저히 비워 모두를 살려낸 이 거룩한 헌신은 참된 '무아(無我)'의 실천이었다.

원숭이 왕의 그 고결한 희생은 116년 전 오늘, 조국의 봄을 위해 자신의 가장 빛나는 청춘을 기꺼이 형장의 이슬로 던졌던 한 청년의 궤적과 완벽하게 겹쳐진다.

3월의 끝자락, 도심의 소음이 아득해지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산책로는 제법 다정하다. 순야옹은 빽빽한 도심의 시끄러움을 뒤로하고 공원 입구로 걸음을 옮긴다. 한걸음 뗄 때마다 우람한 소나무들이 짙은 솔향을 뿜어내며 마치 호위하듯 양옆으로 도열한다. 소나무 잎 사이로 부서지는 봄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가파른 역사의 한 페이지처럼 선열들의 묘역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순야옹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의사(三義士) 묘역’으로 향한다.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에 의해 해외에 흩어져 있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조성한 민족의 성소다. 그리고 그 세 분의 무덤 바로 옆, 순야옹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은 주인을 기다리며 비워져 있는 또 하나의 무덤, 바로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 앞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의 총탄을 명중시킨 것은 결코 맹목적인 복수심이나 우발적인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사늑약을 강제하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의 죄목을 세계 만방에 고발하고 심판한 것이다. 이는 삿된 탐욕으로 생명의 그물을 찢는 제국주의의 폭거를 향해 내리친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의 추상같은 철퇴였다.

당시 일제의 강압 앞에 국권을 잃어가며 깊은 무력감과 패배감에 빠져 있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하얼빈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캄캄한 어둠을 단숨에 찢어발기는 거대한 죽비소리였다. 일제가 거짓으로 포장한 '조선의 자발적 복속'이라는 기만을 전 세계에 폭로함과 동시에, 조국 땅의 백성들에게는 "대한의 혼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펄떡이는 증명을 보여준 것이다. 그가 쏘아 올린 탄환은 두려움에 얼어붙어 있던 민중들의 가슴에 주체적인 독립의 불씨를 지피며, 훗날 거대한 민족 운동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갈 저항의 씨앗이 되었다.

그렇게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지핀 청년은 이듬해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중국 뤼순(旅順) 감옥의 형장에 섰다. 서른두 살의 안중근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지어주신 하얀 명주 한복을 입고 의연하게 교수대에 올랐다. "네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머니의 편지는 혈육이라는 가장 끈질긴 세속의 집착마저 끊어낸 불가(佛家)의 '방하착(放下着, 온전히 내려놓음)' 그 자체였다. "국권이 회복되거든 내 뼈를 고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일제는 그의 무덤이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해 유해를 암매장했다. 결국 1세기가 넘도록 효창공원의 이 무덤은 텅 빈 채로 민족의 집단적 상실을 증명하고 있다.

순야옹은 텅 빈 무덤 앞 벤치에 걸터앉아 배낭에서 스테인리스 보온통을 꺼낸다. 뜨거운 물이 표일배를 통과하며 진한 보이숙차를 우려낸다. 흑갈색 찻물이 잔을 채우는 동안, 이 '빈 무덤'이 뿜어내는 먹먹한 침묵을 사유한다.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본질이 고정된 실체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공(空)'의 진리를 가르친다. 안 의사는 동양의 평화라는 거대한 뜻을 위해 자신의 젊음과 생명은 물론, 사후의 육신이 묻힐 한 뼘의 땅마저 남기지 않았다. 완벽하게 비워냈기에 역설적으로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영원히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동양평화론』을 보면, 그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의 주권을 존중하며 상생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는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그물코처럼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는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이자, 화엄경의 '인다라망(因陀羅網)' 세계관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제국주의의 탐욕으로 찢긴 생명의 그물을 자신의 몸을 뻗어 기우려 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자 무리를 위해 기꺼이 다리가 되어준 원숭이 왕이었다.

보이차 한 모금을 천천히 삼키며 비석을 어루만지듯 바라본다. 누군가 기꺼이 삼킨 독약과, 육신마저 텅 비워낸 철저한 헌신이 거름이 되었기에 오늘 우리의 봄은 이토록 눈부시다. 찻잔을 감싼 두 손에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1910년 3월의 차가운 형장을 데우던 한 청년의 심장 박동처럼 순야옹의 가슴을 먹먹하게 두드린다.


순야옹의 시(詩)

무리를 살리기 위해 등뼈를 내어준 원숭이 왕처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차가운 뤼순의 돌벽 아래 섰네.

얽히고설킨 인다라망 그물 속에서

스스로를 텅 비워내어 조국의 봄을 채웠음이라.

효창공원 소나무 숲,

주인 없는 빈 무덤 앞에서 우려낸 찻물.

한 모금 묵직한 흑갈색 찻물 속에

백 년 전 그날의 단호한 먹물 향이 피어나네.


[오늘의 법구경]

전쟁터에서 백만 명의 적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승리자이다. (『법구경』 제8장 천 게송의 품, 103게송)


[순야의 추천 도서: 안중근 의사의 숨결을 곁에 두고 싶다면]

이번 주, 순야의 사유에 함께 마음이 뜨거워지셨다면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 직전까지 써 내려간 『동양평화론』을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동양평화론』은 사형 집행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아쉽게도 미완성 유고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는 주로 안 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함께 한 권으로 묶여서 출판되고 있습니다. 최근 현대어로 아주 읽기 쉽게 다듬어져 새로 출간된 판본이 있으니, 가까운 공공도서관에서 빌려보시거나 서점에서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었던 32세 청년의 단호한 문장들이 깊은 울림을 줄 것입니다.

도서명: 안중근 자서전 (동양평화론 수록), 저자: 안중근, 출판사: 더스토리, 출간년도: 2024년 (2025년 문고판 출간)


[연재 안내]

'순야(純爺)의 갈색 사유'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차 향기와 함께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지혜의 문장이 당신의 주말을 포근하게 감싸 안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말,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차 한 잔 나누며, 나를 비워 세상을 채우는 평온한 시간 보내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앞 화의 내용]

純爺(sunya)의 갈색 사유 5화 회암사와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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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爺(sunya)의 갈색 사유 4화 마곡사와 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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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爺(sunya)의 갈색 사유 3화 해인사 폭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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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爺(sunya)의 갈색 사유 2화 재동(齋洞)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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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爺(sunya)의 갈색 사유 1화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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