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야의 돋보기] 제8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by 순야 착지

마음이 지어낸 감옥, ‘아집’의 마법을 푸는 법


월요일 아침, 거울 앞에 선다. 며칠 사이 부쩍 늘어난 주름과 무거워진 눈매를 보며 한숨을 쉰다. 우리는 종종 세월이 우리를 늙게 만든다고 믿지만, 가끔은 마음의 무게가 육신의 시간을 앞당겨 버린 것은 아닌지 서늘해질 때가 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거울 속의 ‘나’는 순식간에 노인이 되기도 하고 아이가 되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 마음의 연금술을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구현한 작품이다. 나는 수시로 젊음과 늙음을 오가는 소피의 모습과 위태롭게 걷는 거대한 성을 보며, 불교에서 말하는 아집(我執)과 오랜 시간 쌓아온 습기(習氣)가 어떻게 우리의 겉모습(相)마저 지배하는지를 뼈저리게 확인했다.

우리를 가두는 가장 무서운 저주는, 외부의 마법사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었다.


잡동사니로 지은 마음의 요새, ‘움직이는 성’

모자 가게에서 일하던 18세 소녀 소피는 황무지 마녀의 저주를 받아 하루아침에 90대 노파로 변한다. 쫓기듯 집을 나선 그녀는 우연히 마법사 하울의 기괴한 ‘움직이는 성’에 들어가 스스로 청소부라 우기며 눌러앉는다. 그곳에서 성의 동력원이자 하울의 심장을 가진 불꽃 악마 캘시퍼를 만나고, 그와 하울 사이의 비밀스러운 계약을 알게 된다.

이 거대하고 기괴한 ‘움직이는 성’은 사실 하울의 내면을 그대로 시각화한 건축물이다. 온갖 고철과 잡동사니가 위태롭게 엉겨 붙어 삐걱거리는 이 성은, 전쟁과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하울이 쌓아 올린 거대한 자아의 요새, 곧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我相, 나라는 실체에 대한 집착)이다.

화려하고 강력한 마법사처럼 보이지만, 하울의 내면은 어린 시절 악마에게 심장을 내어준 뒤 겁에 질려 숨어버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성이 끊임없이 장소를 옮기며 도망치는 것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그의 회피 심리를 보여준다. 소피가 이 성에 들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수십 년간 쌓인 묵은 때와 거미줄을 걷어내는 ‘대청소’였다. 이것은 하울의 마음에 켜켜이 쌓인 오랜 번뇌의 습기(習氣, 습관의 에너지)를 닦아내는 행위와도 같다.


심리학의 돋보기: 아들러의 목적론과 스스로 선택한 ‘열등감’

하울이 화려한 성 뒤에 숨었다면, 소피는 ‘늙은 몸’ 뒤에 숨었다. 저주를 받기 전 18세의 소피는 젊지만 전혀 생기가 없다. 화려한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며 “나는 예쁘지 않으니까”라며 칙칙한 드레스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이를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흥미롭다. 아들러는 인간의 불행이 과거의 원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어떠한 ‘목적’을 위해 불행을 선택한 것이라고 보았다. 소피의 무기력과 열등감은 세상으로 나아가 상처받거나 도전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다. “나는 어차피 볼품없어”라고 규정해버리면, 더 이상 삶을 향해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황무지 마녀의 저주는 외부에서 온 폭력이라기보다, 소피 내면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마음의 노화’가 겉으로 드러난 완벽한 핑곗거리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의 파동에 따라 변하는 상(相)

이 영화에서 가장 경이로운 부분은 소피의 늙은 모습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울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어 맞설 때, 혹은 하울과 아름다운 꽃밭을 거닐며 마음을 활짝 열 때 소피의 주름은 마법처럼 사라지고 다시 생기 넘치는 소녀로 돌아온다. 그러나 “하울은 떠날 거야, 난 예쁘지 않으니까”라며 다시 자의식에 갇히는 순간, 찰나에 쭈그렁 할머니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탁월한 은유다. 존재의 형태(相)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마음 상태에 따라 물결처럼 변한다. 무겁고 옹졸한 자아(我執)에 갇힐 때 우리는 순식간에 늙고 쇠약해지며, 나를 잊고 타인을 향한 자비와 용기를 낼 때 가장 찬란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회복한다.

결국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늘 도망치기만 하던 하울은 소피를 만나 "마침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며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선다. 소피 역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하울과 캘시퍼의 어린 시절 계약을 목격하고,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을 내어주며 악마와의 계약을 풀어낸다. 하울에게 심장을 돌려주어 그를 살려내고, 무거운 짐이었던 움직이는 성은 마침내 붕괴된다.


무아(無我)의 자유: 나를 잊을 때 비로소 내가 된다

아상(我相)의 덩어리였던 거대한 성이 무너지고 캘시퍼가 자유를 얻은 순간, 소피의 저주도 완전히 풀린다. 흥미로운 것은, 18세 소녀의 얼굴로 돌아왔음에도 소피의 머리칼은 할머니 때의 은빛 그대로라는 점이다.

이 별빛 같은 은발은 소피가 단순히 과거의 겁쟁이 소녀로 돌아간 것이 아님을 상징한다. 스스로를 가두던 열등감(아집)을 태워버리고, 삶의 온갖 풍파를 겪어낸 지혜를 지닌 채 마침내 ‘온전하고 자유로운 나’로 재탄생했음을 보여준다. 고정된 나를 버리는 무아(無我)의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생생하고 주체적인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를 항복시키는 월요일의 돋보기

오늘 아침, 당신은 어떤 저주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섰는가. “내 나이에 뭘 새로 시작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낡고 무거운 노파의 몸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하울처럼 상처받기 두려워 온갖 잡동사니 스펙과 화려한 포장지로 무거운 ‘움직이는 성’을 끌고 다니지는 않는가.

우리를 시들게 하고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결국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두는 마음의 오랜 습기와 좁은 아집뿐이다.

아들러의 통찰처럼, 마음의 감옥은 내가 스스로 지었기에 언제든 내가 그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다. 오늘 하루, 굳어진 나를 고집하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아 보자. 소피처럼 누군가를 위해, 혹은 내 삶을 위해 작고 용기 있는 걸음을 내디딜 때, 무겁게 끌고 다니던 내 마음의 삐걱거리는 성도 거짓말처럼 허물어질 것이다.


[연재 알림]

순야의 돋보기〉는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 바쁜 일상 속 잠시 머리를 식히는 지혜의 스토리를 배달합니다.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이 짧은 글이, 여러분의 마음에 투명하고 평온한 돋보기 하나를 놓아드리길 바랍니다.


[순야의 철학 서재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①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저 / 전경아 역 / 김정운 감수, 『미움받을 용기』 (인플루엔셜, 2022년 12월 28일) :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대화 형식으로 쉽게 풀어낸 책.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현재의 '목적'이 삶을 결정한다는 통찰이, 마음의 감옥을 깨는 데 큰 용기를 줍니다.

② 틱낫한 저 / 최수민 역, 『화(Anger)』 (명진출판사, 2013년 04월 20일) : 우리 마음속에 쌓인 부정적인 감정과 번뇌의 '습기(習氣)'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화롭게 닦아내야 하는지, 불교의 지혜를 가장 일상적이고 따뜻한 언어로 안내해 주는 현대의 고전입니다.


[이전 글 읽기]

순야(sunya)의 돋보기 제7화 써로게이트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61

순야(sunya)의 돋보기 제6화 파프리카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43

순야(sunya)의 돋보기 제5화 인 타임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42

순야(sunya)의 돋보기 제4화 센과 치히로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41

순야(sunya)의 돋보기 제3화 붉은 여왕의 경주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40

순야(sunya)의 돋보기 2화 숙업과 현업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32

순야(sunya)의 돋보기 1화 반칙과 평등심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