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를 잘 받아들이는 것 역시 큰 복덕을 가지게 된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여래께서 가르치는 바대로 머물고 행하면 그 복덕이 허공과 같이 무량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행(行)과 실천의 문제가 나온다.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무주상보시를 받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무주상보시를 잘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는 잘 받는 것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잘못 받으면 상대방의 무주상보시를 헛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어야 겨우 보시를 받을 수 있는 응공(應供)이란 이름이 붙는다.
무주상보시로 받은 것은 역시 무주상보시로 돌려주어야 한다.
무주상보시를 잘 받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무주상보시를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은 물질이나 마음으로 돌려주면 상에 머물기 쉽다. 그래서 되도록 받은 그 사람의 무주상보시를 법계(法界)에 잘 회향해주어야 하는데, 부처님에게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주든지 나중에 그 사람의 복덕을 빌면서 자기 역시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순수하게 감사하는 마음만 가져야 한다.
자기가 무주상보시를 받을 때 자기 내면을 잘 살펴보면 여러 가지 마음이 뒤섞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한다든지 자기 처지를 더욱 비관한다든지 공짜라고 좋아한다든지 하는 등의 잡다한 마음은 자기 영혼을 오염시키고 상대방의 무주상보시를 모독하는 것이다.
3. 스스로 자기 내면의 힘을 불러일으켜야 된다.
상대방의 무주상보시는 나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마음이다.
그러니 그 마음을 잘 받아들인다면 무주상보시를 받는 미안함과 부담감을 잘 돌려 자기 역시 더욱 힘을 내어서 잘 되어보기를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무주상보시를 잘 받아들이는 것도 무주상보시의 공덕을 서로서로 키우는 것이다.
무주상보시를 잘 받아들이면 받아들이는 자기 또한 허공과 같은 복덕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무주상보시의 묘행(妙行)이다.
이번 장에서는 상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설하신다.
그런데 보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상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인지라, 모든 것에 내가 머물려고 해도 머물 수 없게 되어 있는 법이다.
재물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 모으면 이제는 이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그 순간 재물이 흩어지는 쪽으로 큰 흐름이 생기게 된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에게 있는 것이 완전하게 갖추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완전해지는 쪽으로 모든 것이 전개된다.
이것을 물극필반(物極必返)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것이 극에 달하면 반대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어느 것에도 머물 수 없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에게는 내 마음이 찰나도 머물지 않는 삼라만상의 흐름과 항상 궤적을 같이 하여 흘러 다녀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이것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존재를 도인(道人)이라고 한다.
이때 비로소 고(苦)를 초래하는 자기 마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자, 자기 자신이 부족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계속 넉넉하고 충분해지는 쪽으로 자기 자신과 인생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무 부드럽고 완만하게 흘러가니 그 흐름을 인식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 인생에 실망할 이유가 없고 비관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자, 자기 자신이 충분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 흩어지고 무너지는 쪽으로 자기 자신과 인생이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순간 폭포를 만나서 혼동을 일으키기 전에 지키려고 하지 말고 잘 흘려보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 이상적인 것이 바로 무주상보시라는 것을 일깨워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