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2021년 여름 Mi Casa es Su Casa, 사라와아흐메드
아부다비는 위아래로 길쭉하게 생겼다. 우리 가족은 아부다비에서도 북쪽 끝, 두바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라하구역에 살았다 아부다비시 라하구정도라고나 할까.
그 곳에 바다를 끼고 줄 지어 있는 아파트는 라마르, 무니라, 제이나가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서 이 세 개의 아파트들과 그 주변 작은 빌라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커널 워크(Canal walk)이라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이용했다. 각 아파트 단지들이 서로 커널워크로 이어져 있어서 옆 아파트에 있는 슈퍼마켓이나 식당을 가기도 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이 길은 밤낮으로 아름답고 시원해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운동을 하거나 산책했다.
내 가족은 그 트리오 아파트 중에서도 가장 북쪽 끝에 있는 제이나에 살았다. 나의 아부다비 살이는 세 가지 단어로 설명된다. '제이나, 아미티, 친구들' 이 세 가지는 나의 아부다비에서의 살이를 돌아보았을 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들이다. 또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내 가족이 3년간 살았던 제이나는 나를 깊은 아부다비를 사랑으로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그 곳에서 많은 동네 친구들을 사귀었고, 밤낮으로 수영을 했고, 자주 맨발로 해변을 거닐었고, 늘 화창한 아부다비의 날씨 덕분에 매일 아침 선베드에 누워서 해의 기운을 온통 받을 수도 있었다.
우리집은 E2동의 복도 끝에 있는 집 타운하우스 01이었다. 줄여서 E2-01라고 하고 영어로는 E two Zero one 이라고 불렀다. 우리 집을 시작으로 하나의 복도를 끼고 일곱 집이 있었다. 원래 우리 옆집 E2-02호집은 영국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돌쟁이 아기의 건강 때문에 마당이 탁 트인 제이나가 부담스러워진 아기 엄마는 곧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운명의 가족, 사라와 아흐메드 부부가 E2-02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 날은 여느 주말과 같았다. 나는 잠이 덜 깬 채로 우리 집 1층 마당에서 빠져 나와 큰 길로 이어진 산책로에 막 들어섰다. C동에 웨이트로즈 마켓에 바게트를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 아부다비는 물가가 비쌌지만 상대적으로 빵은 저렴한 편이다. 특히 바게트는 한 개에 천 원이 채 안될 정도로 저렴하다. 게다가 아부다비에는 인구 구성 중 유럽, 아프리카, 중동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은 모두 밥보다 빵을 많이 먹었다. 바게트는 모두에게 늘 인기였고 그래서 갈 때 마다 막 새로 구운 바게트를 살 수 있었다. 그 날도 내 통밀 바게트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반 바게트 그리고 루어팍 Lurpak 무염버터를 소중한 아기처럼 안고 뚤레뚤레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집 마당에서 재잘거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드디어 옆 에집 누가 이사를 왔나보네 하고 생각하며 마당을 쳐다보니 올망졸망한 여자 아이가 둘있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의 파란눈을 가진 아이 하나와 곧은 갈색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아이 하나가 영어로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 둘쨋 딸, 민하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그녀들의 영어에서 강한 영국억양이 뭍어났다. 가볍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아부다비에선 길을 걷다 낯선 이와 눈이 마주치면 늘 웃는 얼굴로 눈인사를 하거나 그것을 시작으로 간단한 대화를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과 눈도 안마주치곤 했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관심주지 않는 것. 그러다 이 곳에 와서 서로 지나가다 눈만 마주치면 이를 드러내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 분위기였더, 때문에 아침 산책 한번에 30번씩 인사를 하곤 해서 처음엔 어색했다. 하지만 이제는 온동네 주민들이 눈만 마주쳐도 이렇게 따뜻하게 나를 알아주고 반겨주나 싶어 내가 먼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사이 옆집 아이들의 엄마가 때마침 문을 열고 막내처럼 보이는 아기를 한손에 가뿐히 안고 나와 눈을 마추었다. 강력한 영국억양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매운맛이었다. 내가 대화 도중 간간히 응?하며 못알아듣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니 친절하게 다시 말해준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스코틀랜드 엄마와 요르단 아빠였다. 그리고 사이의 딸 3명. 이 엄마, 몸매는 코카콜라인데 목소리는 쏘쿨, 아이들도 티없이 천진난만한 모습들이었다. 아, 강력한 이끌림이 느껴지는데? 우리의 인연은 이 때 시작되어 급기야 우리 가족이 스코틀랜드에 방문하기까지로 이어졌다.
옆집 아이들은 셋이었다. 큰딸 재스민, 둘째 마야, 셋째 아미라. 아빠는 갈색머리에 갈색눈의 요르단 출신, 엄마는 금발에 파란눈 스코틀랜드 출신이라 아이들의 머리칼 색깔과 눈동자 색이 신기하게 다 달랐다. 첫째는 금발에 녹색눈, 둘째는 갈색머리에 갈색눈, 막내는 금발에 파란눈이다.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때가 있다. 평소에 내가 잘 접하지 못하는 색의 금발과 파란눈이 그들에겐 새로울 것 하나없는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제이나 동네에 그런 아이들이 많았다. 아부다비의 주택가 중 유럽 가족의 거주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딸들은 처음 이런 외모의 아이들을 보고 나처럼 '너무 예쁘지 않아?'를 연발했다. 어떨 때는 나도 금발에 파란눈이면 하고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조금 피부가 어두운 아이를 만나고 온 날, 그 아이는 피부가 어두워서 안예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차했다. 그래. 나도 금발에 파란눈이 낯설고 새로워 아름답다고 인식하는데 아이들은 오죽하겠나 싶었다. 문제는 그 반대였다. 피부가 어두우면 안예뻐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이 느낀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이 될만한 사회적, 문화적 노출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아마 둘다의 콜라보겠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설명을 해주어야겠다 싶었다.
'주하야, 민하야. 금발 머리 예쁘지? 파란눈도 신기하고. 하지만 그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외적 속성(부분) 중의 하나야. 누구는 눈이 크고 누구는 발목에 점이 있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적 속성(부분)도 있어. 누구는 매운 걸 잘 먹고, 영화관에 가는 걸 싫어할 테고, 누구는 공부를 좋아하고, 누구는 반복해서 어떤 일을 하는 걸 좋아하고, 누구는 새로운 일을 찾아다니지.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인식하는(느끼는) 것은 그 사람의 일부분이라서 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하고 판단할 수 없어. 물론 순간적으로 특정한 감정이 일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누구도 너희 둘을 그러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도 안되기 때문이야. 우리는 고유한 모습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단다.'
말하고 보니 거창하게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딸들은 이내 내 말을 이해한 눈빛을 보였다. 우리는 상대를 존중해야 하고, 우리 자신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딸들이 그것을 잊지 않았으면 했다.
어쨋든 옆집 딸들은 내 딸들과 같은 아미티에 다녔다. 그래서 더욱 가까워 질 수 있었다. 첫째 재스민은 나의 둘째 민하와 같은 학년이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때로 나의 첫째 주하와 그집 첫째가 더 친하게 노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민하는 또 둘째 마야와 놀거나 그 집 강아지와 놀기도 했다. 함께 놀이터에 가고,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고, 서로의 집이 자기 집인 마냥 들락거리며 밥을 먹고, 간식을 마구 꺼내 먹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공동육아가 이런걸까? 옆집 사라와 나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 두집 아이들을 통째 데리고 몰에 있는 실내놀이터에 가거나 식당에 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슬립오버(파자마)를 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서로 순번을 정하지 않고 되는 사람이 아이를 봐주었다. 서로 더 봐주고 싶어 했기에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아줌마가 한국 아줌마만큼 편해졌다. 그렇게 사라와 나도 좋은 친구가 되었다.
제이나에는 옆집 사라네 가족말고도 아미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거의 아이들이 이집 저집 구분없이 섞여서 놀았고, 이집에 갔다 저집에 갔다 하는 날도 많았다. 문은 대부분 열려있었고 아이들은 안전하고 재미있게 유년기의 추억을 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모들도 의례 자녀들 주변에 있거나, 산책을 하거나, 바다 수영을 하거나, 수영장에 있었기에 언제나 어디에서나 서로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가벼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대화가 길어지면 해변 카페 시스웰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서로의 집에 가서 와인에 치즈를 곁들여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동네가 하나의 친목 커뮤니티였다. 동네가 아이를 키웠고, 동네가 부모들을 친목하게 했다. 더할 나위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신이 눈치챈 걸까? 나는 2018년 12월부터 2023년까지 2월까지 4년의 시간을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옆집 가족들은 매우 슬퍼했다. 우리의 인연이 여기서 끝날 것 같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신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같이 옆집 사라네 가족도 10년이 넘는 아부다비 생활을 접고 스코틀랜드로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우리는 스코틀랜드 사라네 동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2023년 2월 아부다비를 떠나며 딸들에게 내가 약속한 한 가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마음의 고향인 아부다비에 1년에 한번 씩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23년 여름 휴가 계획을 짜던 중, 나는 영국 런던을 경유하여 아부다비에 가는 비행기편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런던에서 사라네가 사는 스코틀랜드까지 갈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던 끝에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잇는 기차패스인 4일짜리 브릿패스를 알게 되었다. 사라에게 왓츠앱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날짜를 맞춰보았다. 다행히 우리는 여행의 마지막 즈음에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기차를 타고 사라가 사는 동네로 가기로 했다. 사실 친구의 나라로 여행을 가는 계획을 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8년 겨울 아부다비에 와서 첫째 주하가 친하게 지내던 친구, 아나스타샤의 고향 오스트리아에 방문하는 일정을 넣어 2019년 여름여행을 계획하여 다녀왔고, 2023년 스코틀랜드에 사라를 방문하는 일정을 넣어 영국-스코틀랜드 여행을 계획하여 다녀왔다. 2024년에는 누라의 친정이 있는 요르단에 방문하는 일정을 넣어 요르단 여행을 계획해서 다녀왔고 2025년에는 스위스에 나탈리를 방문하는 계획을 넣어 여행을 계획중이다. 이런 여행의 특징은 유명 장소 방문이 제한적이란는 것이다. 나는 친구의 나라에 가는 것이지 그 나라의 특별한 장소에 가서 인생 사진을 남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유명한 장소와 중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튜브나 책에도 쏟아진다. 이들은 나와 연관성이 별로 없다. 나는 내 친구가 매일 가는 맛집과 동네 작은 책방이 더 좋다.
내 삶의 모토인 여행하듯 살고, 살면서 여행한다는 인생이 자연스럽게 이어져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렇게 여행을 하기 위해서 평소에 절약해야 하는 부분도 많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학교 방과후 수업 두 와개 피아노 학원에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첫째는 과외 수업 하나와 학원 한 두군데를 다닌다. 그것이 우리집에서의 가장 큰 지출이다. 그래도 첫째가 좋아하는 기계체조는 매주 훈련과 수업을 모두 국가에서 지원해주니 교육비가 들어갈 일이 없어 좋다. 기름값이 꽤나 드는 것이 함정이지만.
그래도 내가 아이들과 지키려고 하는 것은 매일 30분 같이 책읽기를 하는 것과 주말마다 도서관을 가는 것이다. 그것도 잘 안될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무리하지 않고 집에서 티비를 보거나 넷플릭스를 보며 쉰다. 집은 바깥에서 보낸 모든 에너지를 보상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도 루틴을 어기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나의 육아방식은 아니기에 나의 딸들은 집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좋은 점은 각자 기량을 발휘할 때 이제껏 본적없는 에너지를 분출한다는 점이다. 나는 가끔 첫째가 잠도 안자고 시험공부를 하거나 둘째가 서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시키지 않았는데도 잠도 안자고 3시간 동안 학습지를 풀때 무서운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저력이 발휘되는 순간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번아웃이 없기에 때때로 그런 능력 발휘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난 그들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공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가 가진 힘을 믿는다. 그것이 언제 어느 순간 발현될지 몰라도 그것을 내가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 한 아이는 꽃이 필 때에 아름답게 필 것이기에.
어쨋든 나의 양육방향은 여행과 독서, 그리고 심미안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부모와 함께하는 것이고, 현재까지는 그러한 것들로 인해 두 자녀 모두 자기주도적으로 나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딸 둘을 낳고 바랬던 것이 있다면 훗날 나와 대화가 가능하도록 다방면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친구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벌써 이루어진 것 같아서 매일은 또 선물이다.
2023년 2월 한국에 돌아오고 난 후, 여름휴가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부다비는 겨울 날씨가 좋다. 아부다비에 간다면 겨울에 가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고 나와 아이들은 분출구를 찾고 싶었다. 마침 아이들이 영국국제학교에 다녔으니 영국을 가본 적이 없는 우리는 한번 쯤 가고 싶은 생각이 있던 터였다. 그래서 영국, 스코틀랜드를 경유해서 아부다비에 가기로 했다. 이런저런 계획을 시작했다. 브릿패스를 찾았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역을 다닐 수 있는 기차패스였다. 나는 런던체류 3일, 에든버러체류 3일 정도의 계획을 세웠다. 마침 에든버러에서는 일년에 한번 에든버러시 전역에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다. 운이 좋았다. 나는 수많은 페스티벌 중 에든버러 대학을 중심으로 열리는 소극장 공연과 길거리 퍼포먼스들을 볼수 있는 프린지 페스티벌에 가고 싶었다. 런던에서는 시내구경과 런던아이 탑승을 하고 워너브라더스에 가서 꿈에 그리던 해리포터를 영접, 에든버러에서는 프린지에 가면 될 것 같았다. 딸들의 친구 중 여름방학 기간 중 런던이나 에든버러 근처에 있는 친구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큰 딸의 절친인 아이샤는 엄마의 고향이 에든버러지만 여름에는 미국에 간다고 했다. 큰 딸의 또 다른 스코틀랜드 친구 애슐리와는 방문 일정이 엇갈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옆집에 살던 사라네 가족과 일정이 맞아떨어졌다. 에든버러 근교에 사는 사라네에 하루쯤 들르기로 했다. 브릿패스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2023년 여름, 영국 땅을 밟았다. 런던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레고로 만든 도시 같달까? 매우 단정했다. 건물들도 높지 않고 해질녘 건물들이 만들어낸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마치 줄을 세워 놓은 듯 반듯했다. 매우 차가울거라고 생각했던 영국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고, 음식도 최악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을 여행하며 영국을 가장 요리가 맛이 없는 곳으로 꼽는데,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런던에서는 런던 브릿지, 성당, 런던아이, 빅밴 등을 방문했다. 그리고 에든버러에서는 2일동안 축제를 보러 다니는데 썻고 에든버러의 둘쨋날 드디어 기차를 타고 사라네 집이 있는 옆 도시로 향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 머릿속 사라는 내 옆집 친구였는데 언제 이렇게 먼곳까지 왔나 싶었다. 그녀가 원래 이렇게 먼곳으로부터 왔나 싶기도 했다. 내가 지은 상에 내가 속는다는게 이런건가. 그녀는 원래 스코틀랜드 사람이니 당연지사인데 말이다. 스코틀랜드는 런던과 억양부터 다른 인상을 주었다. 런던에서는 '헬로우~'하는 나긋나긋한 말투를 많이 들었는데, 에든버러에 도착해서 슈퍼마켓에 물을 사러 들어가자 점원이 무심한듯 힘을 뺀 '하이 여'하는 인사로 우리를 맞았다. 사라가 이런 쿨한 분위기에서 살던 사라라서 그녀에게서 느긋하고 편안함이 뭍어났나보다하고 생각했다.
드디어 기차가 그녀가 사는 도시의 역에 도착하고 우리는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기차역을 찾지 못해 차로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우리는 기차역 주변에 아무렇게나 앉아 그들과의 추억을 곱씹으며 우리의 옛친구를 기다렸다. 옆집 이웃으로 산것이 2년이 넘으니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서로의 희로애락을 곁에서 함께 한 매우 농축된 것이었다. 30분여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그녀가 도착했다. 재스민, 마야, 아미라를 데리고. 아이들은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얼싸안고 빙글빙글돌았다. 나도 사라와 포옹을 하고 손을 맞잡았다. 아부다비가 만들어준 인연이 이 곳 스코틀랜드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지구촌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제주나, 아부다비서 에든버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참 좋아졌고, 그 좋아진 세상을 만끽하는 나와 자녀들이 운이 좋고 축복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우리가 함께 좋아하던 근처 맥도날드에 가서 아이들과 간단히 배를 채우고 바로 옆 작은 시내공원으로 갔자고 했다. 좋았다. 아무거나 먹어도, 어디를 가도 괜찮았다. 내가 그리던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맥도날드에서 나와 길건너 공원으로 갔다. 작은 공원이라기엔 수풀이 무성하고 나무가 웅장해 한국의 국립공원같았다. 스코틀랜드는 1년 내내 비가 많이 와서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다고 했다. 그리고 춥고 비오는 스코틀랜드 날씨가 싫고 아부다비의 쨍한 날씨가 그립다고 했다. 나도 여행이니 이런 날씨에 개의치 않았지만 이 곳에 살아야한다면 그다지 좋지 않겠지? 아이들은 공원 안쪽 놀이터에서 마치 어제 본듯 깔깔거리고 뛰어다니며 놀고 나는 그 옆 벤치에 앉아 사라와 담소를 나누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생활은 가족 옆이라 좋지만 아까 말한대로 날씨의 문제가 있었고 사람들이 친절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 아부다비는 유독 사람들이 친절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게 아니었다. 아부다비에서는 우리 모두 이방인이었으니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갔고, 서로를 이해하려 했고 의지했다. 아부다비에서 살다 자국으로 돌아간 많은 사람들이 자국 사람들의 퉁명스러움과 완고함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어쩌면 아부다비에 살던 우리가 유독 친절했던건 아닐까? 그게 생존을 위한 것이었든, 그곳의 쨍한 날씨와 분위기 탓이었든 아부다비는 그 곳에 머물던 많은 이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음은 분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3시간정도 함께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음을 기약하며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에 온다면 언제나 자신의 집에 머물라며 나와 가족들에게 끝까지 따뜻함을 전해주었다. 나도 그녀에게 말했다. Mi casa es su casa. 내 집이 네 집이야 라는 스페인어다. 우리는 아부다비에서도 그랬고, 앞으로도 서로의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게 될 것이다. 진심은 통하니까. 그걸 봤으니까. 아부다비는 우리의 진심이 합쳐져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다녀온지 벌써 2년이 다되어 간다. 바쁘게 사느라 사진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여행사진을 여러 개 묶어 동영상으로 만들어 놓고는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오늘 글을 쓴 계기로 사진들을 다시 찾아보고 여기 글에 넣어야지. 찹찹하던 한여름 에든버러의 공기가 떠오른다. 추워서 못살겠다던 사라의 말이 매우 공감되었던 그때. 우리 참 용감했다. 브릿패스로 기차를 타던 마지막날 비행기를 놓칠뻔 하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돌아보면 다 추억이네.
영국-스코틀랜드 여행의 마지막날 에든버러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가 지연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원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는 기차로 4시간이면 올수 있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런던 도착 1시간 반 전이었다. 갑자기 기차가 멈추고 방송으로 죄송스럽다는 인삿말과 함께 언제까지 연착될지 모르는 기차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들어야 했다. 누군가 철로에 몸을 던졌다고 했다. 안쓰러움과 황당스럽움과 놀라움으로 기차안은 수군거리는 사람들로 부산해졌다. 철로에 몸을 던진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언제 목적지로 갈지 알수 없다는 암담함이 섞인 부산함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여행객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주변사람과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나는 홍콩에서 온 아주머니와 딸들과 함께 영어로 이야기하다 중국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렇게 처음 2-3시간 지연은 그럭저럭 견뎠다. 기차 밖으로 나가 공기도 쐬고 간식도 먹었다. 하지만 기차가 선지 4시간이 지나 자정이 다가오는데도 움직일 생각을 한지 않았다. 그때 무심코 조용히 있던 영국남자가 한마디 했다. 이런 기차 지연 사고는 영국에서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아휴. 내가 너무 빠듯하게 비행 일정을 잡았나?하는 자책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다 알 수 있었을까? 여행은 이런 불확실성이 가장 큰 매력이자 고난이니 그저 닥치면 해결하자고 생각하고 온 거지하는 위안이 뒤를 이어 따라왔다.
결국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기차 안에 머물고 있던 승객들은 택시 몇대로 런던까지 수송되었다. 다들 지치고 배고프고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와 딸들, 아이들 아빠 그 중 누구도 투덜대지 않고 그 시간을 잘 견뎠고 그렇게 고난의 끝은 우리에게 상처럼 주어졌다. 택시수송을 위해 순서대로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 첫번째 택시가 도착했다. 제일 앞에 서있던 사람들을 태워갔다. 우리 가족은 줄의 거의 끝에 서 있었던 지라 한편으로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라도 얼른 런던으로 갈수 있어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어서 뇌의 회로가 정상작동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이 밀려오고 또 무념무상이 찾아오는 이상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두번째 택시가 왔다. 이번에도 순서대로 택시에 탑승하나 싶었는데, 줄을 서있던 승객 중 키가 큰 유럽인 남자 승객이 말했다. 우리 어린 아이와 노인이 있는 가정을 먼저 탑승시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말들이 일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운좋게
택시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오며 밋밋하던 영국의 인상이 바뀌었다. 달리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게 아니구나 싶었다. 나도 과연 한국에서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용기내어 아이와 노인을 먼저 배려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때로 생각보다 행동이 나를 이끌때가 있다. 나는 비록 온전히 배려심으로 가득차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겠지만 꼭 한번은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은 배려를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이렇게 배려가 오고가다보면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은 푸근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