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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망설이던 마음들

부제_ The Ghost in My Mind #3

by 이안류


X와의 이별을 애도하는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깨닫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 글을 ‘마주하는 나’를 만나며 서서히 드러나는 간극에 서글퍼한다. 오븐에 잘 구워진 페스츄리처럼 우리는 무르익은 사이였다고 생각하며 글을 시작했지만, 한 회차씩 써 내려가며 그 안에 겹겹이 쌓여있던 내 감정을, 내 모순을, 우리의 관계를 발견하고 또다시 바스러진다. 기간은 친밀함을 담보하지 않고, 누군가를 안다는 오만은 시야를 가린다. 특히나 급격히 단기간에 가까워진 관계는 한 사람의 단면만을 경험했으면서 전체를 마치 알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




X와 처음 만난 날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첫 느낌은 경계심이 많고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는 일을 그만둔 후 메마른 마음을 보살피려 상담심리학과에 편입하였고, 학교의 스터디 모임에서 임원을 맡으며 사람들과 적당한 친밀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임원으로서 신입 회원이 오면 안내하는 일을 하지만 워낙 한두 번 참석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을 여러 차례 겪게 되다 보니 의례적인 인사와 모임 소개 정도만 주로 하는 편이었다. 성인들이 공부가 좋아 모인 자발적인 스터디 모임이니 어차피 선택권은 각자에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첫날 X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고는 다음 모임에는 오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의 X는 현재 내가 기억하는 X의 모습과 거의 정반대였다. 어두운 표정과 어색한 눈맞춤, 그리고 주춤거리는 태도는 정말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이 낯선 공간에서 드러내는 수줍음과 불안이었다. 이것이 내 기억 속 첫 X의 모습이다. 친해지고 난 후 X는 그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바닥을 찍을 때였다고 말했다. 몸도 마음도 망가지고 지쳐있는 시기에 여기저기를 떠돌다 모임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별것도 없는 스터디 모임에 와서도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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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바닥을 치는 시기에 사람들은 다들 비슷하다. 한동안 삶에서 반복적인 악재(惡材)를 겪으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다. 실패와 이별, 질병 등의 고통을 거듭하여 자존감은 점점 실종되고, 주변 사람들과 사회의 행태(行態)를 조소하고 비아냥거리고, 자기 연민의 소용돌이에 빠져 흐느끼다가 스스로를 저주하고, 자꾸만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면서도 세상이 나를 잊었다고 슬퍼하며, 자신을 강박적으로 몰아세우다가 이내 내치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리곤 결국 초라하고 푸석푸석한 얼굴에 메마른 표정만 짓는 거울 속의 나를 발견한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들 이 허들을 넘어야 하는 시기를 통과해야 한다. 어떤 시기는 허들이 넘을만한 구간도 있지만 때론 높은 허들이 겹겹이 놓여 있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나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또 넘기를 반복하다가 만신창이가 되는 구간도 존재한다. 이 시기 우리는 대부분 다 비슷하다. 내면의 노숙자들이다.




그래서 X와 처음 몇 번 만났을 때 은연중에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불편했다. 아픈 경험을 겪은 사람은 숨기려는 의식적 욕구와 드러내고픈 무의식적 욕망 사이에서 자기도 모르는 은밀한 심리적 줄다리기를 한다. 특히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몸은 이미 다른 곳에 있지만 여전히 마음은 그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갈팡질팡하는 어긋난 내면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러한 내적 줄다리기는 은연중에 상대방에게 묘한 긴장감과 거리감을 산발적으로 발산하고, 예상치 않은 밀당과 수수께끼는 당혹감을 겪게 만든다. 밝은 날에 드리워진 안개 같은 기묘한 공기를 나의 레이더는 감지했고, 나는 이내 이미 익숙한 모임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아직 나는 남의 고통을 담아줄 여력이 부족했고 나 하나도 온전히 책임지기 버거웠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만났기 때문에 내 몸 쉴 곳을 찾기 바빠서 서로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각자의 쉼터에서 목마름과 허기를 때우고 커피를 마시며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이사로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살게 되었고, 내 이사 소식을 들은 X는 자신의 집과 멀지 않다고 말하며 반가워했다. 낯선 곳에서 조금은 막막했던 터라 X가 근처에 산다고 생각하니 나도 약간 안심이 되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면서 임원 자리를 X에게 물려주고 스터디 모임에서 빠진 상태라, 한동안 나는 X와 모임과 관련된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자주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나의 이사로 거리가 가까워 지자 전화도 더 잦아지고 이후에는 서로의 집에서도 만나면서 급격히 친해지게 되었다.




이사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가 그러하듯 그저 모임의 멤버로 몇 번 더 만나다가 각자의 길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모임의 멤버가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로 발전하였고, 서로 간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심리적 거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는 약간의 긴장감 속에서 하나씩 서로의 겹을 벗어던지며 드러나는 살냄새를 공유하는 조심스러운 과정이었다.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겪은 희로애락을 휴게소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조금씩 풀어놓는다는 것은 상대가 나를 어디까지,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치열하면서도 살떨리는 경계의 조정이다. 이런 것까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받아들여지고 이해받고 수용되기를 바라는 치졸한 조바심이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고 다독여 주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앞으로는 함께 가보자고 손을 잡았다.



만남이 더욱 깊어지고 서로의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X는 내가 처음에 기억하던 소극적인 성향이 아니라 추진력과 자기주장, 인정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컸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 같이 하자고 졸랐고, 수시로 불쑥 전화를 자주 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친해질수록 점점 나를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고, 때로는 내 삶의 경계를 훅 치고 들어오는 것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급격히 발전한 관계는 내 레이더망의 경보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를 적극성, 외향성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친밀감이라 정의 내렸다. 하기사 학원을 오랫동안 운영하던 사람이 소극적이고 경계심이 많을 리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X가 가진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좋았고, 가끔은 떼를 쓰는 모습이 귀여웠고,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맙기도 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누군가와 이렇게 빨리 친해질 확률은 정말 드물고, 이는 소중한 경험이었기에 나는 감사했고,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아마 X도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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