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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Jun 26. 2022

1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



1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 말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이런 일에는 확신이 있다.


확신이 서거나 아는 길을 걸을 땐 불안하지 않다.

행동할 수 있는 에너지만이 필요할 뿐이다.

사람의 말이 에너지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올려주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힘이 될 수 있는 영양소만으로도 충분할 때도 있다.

결정이 났을 때 달릴 수 있는 연료면 된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심각한 상태라는 걸 인정하고 후회도 밀려오는터라 누가 봐도 이 상황이 답답해 보일 것 같다.

윤희 씨네 수국 농장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내고 있던 자개 찬장을 모셔와 복도에 방치해 둔 게 일 년이 넘어버려서 살아있는 것도 용한 일이다. 천정이 무너져 떼어내 버렸고 뒤판도 겉은 일어나서 떼어 버렸고 간신히 얇은 속살만 달려 있는 상황이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내가 원해서 준 건데도 짐을 준 것 같은 마음을 갖게 될지 모를 윤희 씨의 얼굴이 떠올라서라도 반드시 포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예상과는 달리 멋진 마무리를 보고 찬사를 보내게 될 거라는 자신감 정도는 장착하고 있거니와 그런 말은 1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다만 작업에 방해가 될 만큼 충고를 일삼는 사람은 피하게 된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준이 다른 사람이거나 한 꺼풀 벗겨내면 보일 반짝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을 설득하며 살아가기엔 말주변이 부족하다.

차라리 고독하고 힘든 시간을 혼자 감내하고 반짝이는 모습이 보일 때 말이 필요 없는 소통을 하는 편이 좋다.

복도에 방치했던 먼지 가득한 자개장을 작업실 내부로 끌어들였을 땐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을 쏜 것이다.


들여놓으니 상태가 더 심각하다.

무슨 문화재 복원이라도 할 기세다.

지저분해진 뒤판을 떼어내고 이미 사라진 천정까지 새로 합판을 재단해서 붙였다. 자개장이 원래 이렇게 약한 건가? 합판으로 이루어진 골격이 부실해 보인다. 합판 위에 얹어진 자개와 칠이 들떠서 맨손으로 하나하나 만져보며 접착을 하고 클램프로 고정해야 했다.

이 장면에서 90세 노인이 맞닥뜨린 고관절 수술이 떠올랐다.

96세이시던 외할머니께서는 요양원에서 노래자랑을 나가실 정도로 정정하셨지만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미끄러지시는 바람에 고관절 수술을 결정해야 했다.

연로하셔서 수술을 버텨내실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수술을 포기한다면 누워서 생을 보내시며 다른 합병증을 유발하게 될 일이었다. 수술은 잘 되었을지 몰라도 그렇게 할머니는 일어나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과연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볼 수 있을까.

뭐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클램프로 고정하며 드는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얼마나 더 살게 하겠다고 이러는 걸까 싶어서일까?
그래도 살게 하고 싶었다.
우리를 인연으로 이끌어낸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자르고, 칠하고, 붙이고, 닦고, 조이고,

일단 노랑, 고흐의 노랑까지는 아니어도 고흐가 떠오른다는 건 좋다.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게 조금이라도 힘 있어 보이도록 원색은 필수로 넣어 본다.

생원색은 아니고 레모네이드 밀크 페인트라서 적절한 차분함이 있다.

전체적으로 깨끗한 인상을 주기는 어려운 상태여서 털털하게 가기로 한다. 할머니가 손녀 옷을 얻어 입은 것 같은 모습은 좀 아니니까 말이다.

결국 내 느낌인 거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고치고 다듬어서 고유의 감성만은 지켜내고자 하는 고집.

어린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육체는 늙어버린 부조화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

즐거운 작업이면서도 투덜댄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이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몸을 쓰며 힘들게 하는 이 일이 내게 무슨 의미로 남는 걸까?




글을 쓴다.

글로 돈을 벌지 못하니 직업은 아니다.

문득 옆에 앉은 자개 찬장이 보고 있는 걸 알았다.

그림을 그린다.

그림으로 돈을 벌지 못하니 직업이 아니다.

업사이클 작업을 한다.

이것도 돈을 벌지 못하니...

그래도 고맙다고 편을 들어주는 사물들이 있다.

가만히 생각하니 행복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농장에서 여행을 마칠뻔한 자개 찬장이 책방에 잘 어울릴 거라는 걸.

급한 대로 자리를 못 잡던 책들과 장식품들을 찬장 안에 진열해 본다.

찬장 앞에 러그를 깔아서 앉아서도 책을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좋겠다. 잠시 책을 둘러보며 주저앉아 있으면 제집인양 졸음이 몰려올 수도 있겠다.

졸음이 가시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도 될 시간쯤에는 모두가 어색하지 않은 기분일 거야.


1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아서 의아했던 걸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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