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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Apr 14. 2024

<언제나 책 봄>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치유의 힘을 믿어요

졸업 후 뉴욕 중심가의 고층 빌딩에서 화려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나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상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를 가르쳐준 것은
그런 조용한 공간들이었다.
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뉴욕의 중심가 <뉴요커>에서 치열하게 일하며 성공을 꿈꾸던 저자.

평소 각별한 사이였던 형이 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3대 미술관'으로 불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일하게 된다.

관람객들이 입장하기 전 경비원만이 누릴 수 있는 완벽한 고요가 건네는 위로,

삶과 죽음, 예술의 대한 통찰, 우리가 평소 갖고 있었던 고정관념,

무엇보다 예술이 갖는 치유의 힘.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한 마디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지긋이 바라볼 수 있는 작품 한 점이 건네는 예술의 무한한 에너지는

날 다시 일어서게 한다는 걸.


이 번주 책을 고를 시간이 없어 엄마 찬스를 쓰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독서클럽에 나가시는 엄마는 가끔 서너 권씩 책을 사 오시는데 그중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골랐다. 책 읽는 엄마와 한 집에 산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가끔 밥상을 차리면서도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면서도 엄마와 그 주 읽은 책에 대해 종종 수다를 떨곤 하는데, 공통분모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녀를 더욱 가깝게 한다.

1장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란 제목부터 작가인 패트릭 브링리가 궁금해졌다.


<언제나 책봄> 연재를 하면서 정말 신기하고 흥미로운 경험을 몇 번 하게 됐는데, 이 번주는 특히나 더 그랬다. 마치 영화처럼 속에 나오는 배경이나 비슷한 일들이 그 주에 일어나곤 하는 거다. 평소에는 일과 잠시 대기하는 시간이나(내 직업은 비서관이다.) 갑자기 아침 회의가 취소됐을 때 짬짬이 전자책으로 읽고 퇴근 후에는 종이책으로 읽곤 하는데, 책의 전개와 함께 의식의 흐름이 이어져서일까? 그 주의 책 한 권이 일상 속으로 불쑥불쑥 찾아와 작가가 느낀 그 비슷한 감정이 차오르는 경험말이다.

예를 들면 지난주 연재를 마치고 이 책을 읽게 된 시점부터 미술관과 갤러리를 세 군데나 다녀오는 행운을 얻게 된 것도 신기한 점이다.

한 번은 지난 주말 엄마와 나들이로, 두 번은 개관식 행사에 초대돼 청주시립미술관의 '경이로운 여행'과 네오아트센터 1주년 기념 초대전, 예술곳간의 장백순 개인전을 보게 되었다.

전날이 국회의원 총선일이었는데 동서로 뚜렷하게 갈라진 우리나라의 정치적 이념 갈등을 보며 혼탁해진 정신이 깨끗하게 치유되는 기분까지 들었으니, 이게 바로 예술이 갖는 치유의 힘인가 보다.


미국 뉴욕의 한복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바쁘게 살던 작가와

시골 방송국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지난날의 나와 비교를 하는 것 것 자체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작가와 내가 느꼈던 공감의 감정 그 무언가를 계속 오버랩시키곤 했다. 작가가 써 내려간 글을 읽으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는 일. 나아가 작가와 동질감을 느끼며 위로를 받는 일. 이게 바로 책을 읽는 이유다.

기자 생활을 하며 마음이 몹시 힘들었던 때 아무도 없는 고요한 전시장을 찾아 작품과 나, 나와 작품을 오가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지난날의 그 시간들과 작가가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예술의 위대함을 느끼는 일.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며 조금 더 성숙해지는 일.


가능하면 미술관이 조용한 아침에 오세요.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하고도, 심지어 경비원들하고도 말을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면 눈을 크게 뜨고 끈기를 가지고 전체적인 존재감과 완전함뿐 아니라 상세한 디테일을 발견할 만한 시간을 허락하세요...... 어쩌면 그 침묵과 정적 속에서 범상치 않은 것 혹은 예상치 못했던 것을 경험하는 행운을 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사랑하는 형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때

작가는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취직해 10년을 보낸다.

수 천년의 시간이 담긴 고대 유물과 건축물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

그곳을 오가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유형을 관찰한다.

무엇보다 동료 경비원들과 생활하며 차츰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예술과 함께 보낸 축적된 시간을 통해서.


내가 책을 다 읽고 나면 엄마가 이 책을 읽으실 텐데, 얼마 전 사랑하는 이모를 떠나보낸 엄마가 내심 걱정이 됐다. 책장을 넘기며 슬픔이 밀려오는 순간도 있겠지. 그러다가도 하루 중 이모를 몹시 그리워할 만큼 그리워하는 시간도 있겠지. 언젠가는 그런 시간들도 서서히 옅어지는 날이 오겠지? 작가가 미술관의 경비원을 그만두기로 하고 여행가이드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엄마와 단 둘이, 아니 우리 딸도 함께, 세 모녀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거니는 상상을 해 본다.

클로드 모네의 베퇴유 풍경을 보면서, 파블로 피카소의 자화상을 보면서

삼대가 이야기 꽃을 피우는 그 순간을.



*대문 사진 속 그림은 청주시립미술관 '경이로운 여행' 전시 중

스키모토 히로시의 '흑해, 오줄루스' 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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