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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Apr 28. 2024

<언제나 책봄>'꽃으로 박완서를 읽다'

찬란해서 더욱 슬픈 능소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는 걸 느끼면서도 일요일 연재 마감을 위해 늦은 밤 노트북을 연다. 더욱이 소주 서나 잔을 마신 후다. 회식이라 하기에는 업무의 연장선 같이 느껴져 너무 팍팍하고, 꼭 그렇지만도 않은 건 이슬과 함께한 서로의 대화가 너무나 진솔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노트북에 손을 얹기 전 살짝 몽롱한 이 느낌이 좋다. 하지만 늘 마음속에 걸리는 건 술에 관한 성경 말씀이 머릿속에 빙빙 돈다는 게 딜레마다. 사방이 꽃 천지인 4월이 주는 계절적 영향 탓인지 아니면 바쁘단 핑계여서인지 이번 주는 책 읽기가 귀찮았다. 그럴 때마다 날 구원해 주는 건 책 읽기를 좋아하는 엄마다. 엄마 침실이나 책상에는 어김없이 책이 쌓여 있는데 그중에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라 어릴 때부터 쉽게 박완서의 작품을 접해서인지 친근했고, 책 중간중간 보기만 해도 기분이 환해지는 꽃 사진이 들어가 있어 부담이 덜 했. 게다가 야생화와 문학을 사랑하는 기자가 쓴 글이라고 하니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다. 한 번 구미가 당기니 귀찮게 느껴졌던 책 읽기도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조선일보 선임 기자인 김민철 작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출입처와 문화부를 겸했던 나도 지역 작가들을 만난 취재 뒷얘기를 블로그와 sns에 올려놓곤 했었는데.... 기자를 그만두기 책 한 권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란 후회와 아쉬움 밀려오기도 했다.



 

김민철 작가는 박완서 소설 속 주요 소재나 상징으로 등장하는 꽃을 찾아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만의 문학적 표현으로, 때론 기자의 관점에서 박완서의 작품을 재해석했다. 이 책에는 박완서의 소설 가운데 꽃이 주요 소재나 상징으로 쓰인 작품 24편과 주제나 소재가 비슷한 다른 작가의 작품까지 대략 35편의 작품이 들어있다.

이 책 한 권을 내기 위해 작가는 박완서의 작품을 읽고 또 읽을 것이며, 수많은 논문과 방대한 양의 자료 수집, 책 속에 나오는 꽃을 직접 찾아 나서 자신의 눈에 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까? 마음이 숙연해졌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꽃으로 박완서에 접근한 첫 시도인 셈이라고 밝혔다. 박완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꽃에 대한 꼼꼼하고 섬세한 관찰과 고증 속에선 투철한 기자 정신이 드러났고  소설과 현실을 넘나드는 자연스러운 전개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 김민철 작가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져 온라인 리뷰도 찾아봤는데 그중엔 이런 글도 있었다.

제목이 좋아 책을 펴보니 지은이가 조선일보 선임기자다. 조선일보라고 해서 책을 안 사려고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글을 너무 잘 쓴다. -온라인 댓글 중에서-



온라인에 올라온 짤막 서평을 보고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났다. 문학 장르조차도 정치판과 같이 동과 서로 나뉜 이 슬픈 현실을 마주하며 잠시 뒷맛이 씁쓸하다.




시간에 쫓겨 읽지 말고 두고두고 생각나면 꺼내보는 책, 먼 훗날 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리우면 다시 찾게 될 책이 될 것 같다. 지난 화요일인가? 모처럼 일찍 퇴근 후 저녁을 반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아빠 옆에서 이 책을 읽었다. 두 아이들과 친정 엄마는 일찌감치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고 아빠 홀로 식탁에 남아 소주를 드시는 걸 보고 그냥 들어올 수가 없어서였는데, 아빤 책 읽는 딸을 옆에 두고도 계속 혼잣말로 정치 얘기를 하신다.

"썩어빠졌어. 나라 꼴이 어찌 되려고 저러는지 쯧쯧.." 종편 뉴스를 안주 삼아 나와 TV모니터를 번갈아 보시던 아빠는 슬슬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뭔지 궁금하셨나 보다. '40년 전에 쓴 <82년생 김지영>' [서 있는 여자]/ 노란 장미' 편을 읽기 시작했던 터라 쉴 새 없이 떠드는 뉴스 패널을 째려보며 티브이를 끌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여고 동창인 닥터 박은 경숙의 남편 하석태가 기르는 석류나무가 작다고 비웃으며 자기 집에는 그보다 훨씬 무성한 석류나무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닥터 박의 집 석류나무는 그녀의 이야기와 사뭇 달랐다. 경숙은 "석류나무 거목에 걸었던 동화적 기대가 까닭 없이 무너지는 서운한 기분을 맛"본다. 경숙은 돈과 직업은 있지만 불안정하고 고독하게 사는 친구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박완서의 <서 있는 여자> 中에서


그런데 아빠가 책 속의 석류나무꽃 사진을 보며 "아빠 고향 청천 송면 집 마당에 석류나무가 있었어"라며 말문을 연다. 지긋지긋한 정치 얘기가 아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와 책 속의 붉은 석류나무꽃 사진을 번갈아 바라본다.


"석류나무가 추위에 무지 약해. 그래서 늦가을쯤 되면 땅을 파기 시작해서 석류나무를 땅에 묻는 거야"

"어? 그게 가능해? 뿌리를 뽑아서 나무를 묻었다가 다시 심는다고?"

"아니.. 뿌리는 반이상 흙 속에 남겨두고 나머지 부분을 뉘어서 묻는 거지. 그리고 겨울을 지나고 나면 다시 제대로 세워 심는 거야. 빨갛게 핀 꽃이 얼마나 예뻤는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빠를 정말 예뻐했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추억은 많이 없지만 할아버지가 참 보고 싶어. 내가 꼭 할아버지를 닮았다니까. 큰 형이랑 나랑은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고 둘째 큰 아버지랑 막내 삼촌은 할머니를 닮았지. 성격도 비슷하고.. 허허..."


얼큰하게 술에 취한 아빠의 목소리는 고향과 돌아가신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 왠지 쓸쓸하게 들렸다. 그래서 한참이 지난 후에도 아빠 옆에 앉아 책을 읽었다.




화려한 팜므파탈 <아주 오래된 농담> 능소화

그 무렵 그(영빈)는 곧잘 능소화를 타고 이 층집 베란다로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창문은 검고 깊은 심연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심연에 다다르지 못했다.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  중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편


박완서의 능소화에 대한 묘사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능소화는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기도 하고, 장작더미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 능소화는 여주인공 현금처럼 '팜므파탈'이미지를 지닌 화려한 꽃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박완서의 능소화에 대한 묘사를 화려한 팜므파탈로 비유했지만

내게 능소화는 너무나 화려하고 찬란해 되레 슬픔이 밀려왔다는 엄마의 일기로 기억되어 있다.

지금은 완치되셨지만 3년 아빠가 처음 아프다는 이야기를 서울 삼성병원 의사에게 듣고

청주로 내려오던 길.

고속도로 소음방지 벽에 걸쳐 흐드러지게 피었던 능소화를 보며 엄만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서울 다녀오는 길.

삼성병원을 지나 2km 넘게 이어졌던

붉은 능소화

내 눈물과 섞여버린 붉은 능소화는

왜 이리도 아름다운 걸까?

붉은 능

재밌는 문구를 단 버스가 앞서간다.

따라나 가볼까?

30만 원 받고 어디로 도망가볼까?



그래서인지 난 매년 여름이면 찬란하게 활짝 핀

능소화를 보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다가도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모님 손을 잡고 우리 가족이 함께

산책할 수 있음에 미소 짓게 된다.


나의 엄마는 박완서의 글을 좋아하고,

엄마 딸인 나도 박완서의 글을 좋아한다.

서정적이면서도 시대정신을 꼬집는 필력으로

여성 문학인의 힘을 보여준다.

신랄하고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적절하게 은은한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박완서 작가의 글에는 내 고향 괴산의 향기가 난다.

박완서의 글 속에 나오는 꽃이란 소재로 멋진 책을 펴낸 김민철 작가, 박경리의 토지 편도 있다고 하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책을 읽는 내내 색연필로 보태니컬아트를 그리는

엄마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오버랩되었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마흔 다섯 딸에게도 마냥

딸 바보인 아빠의 사랑을 다시금 느끼게 했던 따스한 한 주였다.


*능소화 그림은 나의 엄마인 박정자 작가가 그린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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