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침묵도 여인숙

by 변한다


비가 또 내립니다. 하늘의 다크서클이 땅거미와 친구하자고 달려들 정도로 회색빛 짙은 하늘에 큰비로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니 비탄을 금치 못하가도 수해 현장에서 사진 찍기 놀이나 하고 재난을 정쟁으로 세상 한심한 작자들을 무더기로 접하고 있노라면 천인공노하다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슬픔이 밀려옵니다.


오 헨리의 단편인 ‘백작과 결혼식 손님’에서 젊은 시절의 슬픔과 노년의 슬픔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짐은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만큼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노년에는 나눠주고 또 나눠줘도 슬픔이 항상 그대로다. 나이듦의 그 무게만큼 고독도 슬픔도 누적되는 법. 40대 중반의 나는 그래서 어떤 슬픔의 축적치를 갖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이란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여인숙’ 이 문득 떠오릅니다.



인간은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짧은 순간의 깨달음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무리여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버리고


가구들을 모두 가져가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인간은 여인숙이다. ‘ 기막힌 표현 아닌지요. 모든 것은 나의 삶에 초대된 것이니 전부 다 받아들이랍니다. 나에게 닥친 슬픔과 기쁨도 모두... 젊었을 때 비탄의 감정을 갖고 있긴 했지만 격렬했으나 나이를 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몹시 고요해진다고 <읽는 인간>의 오에 겐자부로는 마흔 대여섯살부터 그렇게 느꼈다 하더군요. 허나 저자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가 좀 더 더 나이가 먹으면 이번에는 고요해야 할 슬픔이 거꾸로 더 광폭하고 격렬한 슬픔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게 역전되어 본인에게 돌아올거라는 예고도 했습니다. 당장 궁금하긴 하나 좀더 나이들어봐야 알겠으니 잠자코 기다려볼 생각입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손을 들어줄지, 아님 그의 친구 말에 공감을 할지 말지


안타까운 이들을 한순간에 삼켜버린 저 잿빛 하늘을 보노라면 한없이 가라앉음을 느끼니 일단은 슬픔을 가능한 삼키기 위해 쓰기 속의 침묵을 청해야겠습니다. 쓰는 순간의 고요와 딱딱하게 굳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흐르는 그 시간 그 속에서 쓰는 자신의 존재를 좀 더 새롭게 하고 확장케 합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한 나는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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