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채용 플랫폼에 이력서를 보고 나를 보고 싶어했습니다. 이력서도 다시 그 회사에 맞춰 내고, 기획서까지 내라 해서 부랴부랴 적었죠. 여러 직무에 대한 제안을 주면서 고르라는 식의 임원면접까지 봤습니다. 무려 2시간동안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나름의 품을 들였기에 기대를 했고 연락을 주겠다고 해서 기다렸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연락을 주겠다는 그 시일을 넘겨 이틀까지 참아보다가 문자를 했습니다. 돌아오는 답변은 급한 채용이 아니니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것. 숨을 고르고 그럼 4가지 포지션이 하나같이 시기적으로 연기된 건지 확인을 다시 해봐달라고 했습니다. 담당자는 알아보고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설상가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만저만해서 한 직무가 아직 있으니 다시 지원해보겠냐고 묻더랍니다. 그리고 또 면접을 볼 수 있다는 말까지. (두 번의 면접은 그럼 나닮은 귀신이랑 봤나요. 공포영화인지 어지간히 무섭습니다.)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 같으면 지금 어떤 말을 하겠냐고 이게 정상적인 프로세스인지를 되물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당신네 회사에 내가 지원을 한 게 아니라, 연락을 준 건 그쪽이어서 보잘 것 없는 나란 사람을 알아봐준 것 같아 그 정성이 고마웠고, 그래서 면접 두 번에, 기획서까지 낸 거 아니겠는가라고. 기한 내 연락도 없고, 급한 채용이 아니라고 해놓고 다시 전화 와서 자리가 하나 있고, 지원을 해 면접을 또 보라니 이게 우롱이지 뭐겠냐고요.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읊어대는 내 랩 비스무리 섞인 반박에 연락을 늦게 해준 건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더군요. 결국 나는 우롱당하고 배려받지 못했습니다. 아차차 내 기획서 중 괜찮은 게 있어 실제 반영해봤다는 사장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혀 한쪽을 깨물었습니다. 그럼 공짜로 나의 아이디어를 훔쳐간건가 신박한 사기인가 싶기도 말이죠.
부글부글 내 마음을 끓여대고, 그동안 내가 들인 시간이 아깝다, 탄식하던 찰나에 안광복의 <서툰 인생을 위한 철학수업>에서 이 구절을 봤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깊은 뜻을 모른다고 속상해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상대의 행복이다.” 담당자 그녀는 그 회사는 그들 그릇에 맞는 어울리게 사람을 뽑는 것일 뿐, 당황한 내가 상처받은 내가 그냥 비켜 지나가면 되는 겁니다. 그래, 화나는 건 내 손해인데 그까이껏 배려없음, 기껏해야 우롱있음 꿀꺽 참고 넘어가야지 별 수 있겠는지요.
소노 아야코의 <알아주든 말든>에서 ‘기껏해야‘는 결코 상대나 그것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추궁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 했다. 기껏해야 사장, 기껏해야 너희 회사라고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이 더 이상 사장이 아닐 때도 그게 더 이상 그것이 아닐 때도 다시 말해 지위나 명예, 돈이 없어져도, 상대나 그것을 존중히 여길 수 있다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까이꺼, 기껏해야 그것이 별게 아니라는 그 무덤덤한 마음으로 내 마음 속 보글거리는 분노의 기포들을 글쓰기와 함께 잠재워봅니다. 그러고 보니 담당자에게 내 책을 선물했는데, 이미 쓰레기통에 버렸을려나요? 아이고 아까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