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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by 봉수니

시나브로,

그 사람은 내게 사랑이 실재한다는 걸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었다.

차가운 겨울밤,

맞잡은 손끝에 스민 온기만으로도

청춘의 모든 계절을 걸어도

아깝지 않다고 믿었던 순간이 있었다.

지금은 더 이상 마주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는 여전히 내 기억 깊은 곳,

작은 온돌방처럼 따스한 한켠에 살아 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언제 꺼내도

눈시울이 젖는 나만의 향수가 되었고,

너무 오래된 감정이라 꺼내는 순간

빛이 바랜 필름처럼 흐릿해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조용히, 말없이,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기로 했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시절 내가 품었던 진심은

아직도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때처럼 모든 걸 걸지 않아도 괜찮은,

하지만 언제든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그런 단단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에 놓아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작은 화분처럼,

내 곁에서 은은한 풀 내음을 풍기며 천천히,

함께 피어날 사람.


빠르게 지나가는 말보다,

한마디 한마디를 잔잔한 물결처럼 나눌 수 있는 사람.


속이 깊고, 말없이도 따뜻한 사람.

말보다 눈빛이 먼저 안부를 전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는,

노을빛이 드는 저녁에

서로의 하루를 풀어내며

작은 낭만을 함께 적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날을 소망한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이제는 서로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랑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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