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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뱅대리 Mar 24. 2024

냉장고야 나 좀 부탁해

'너는 긍정  나는 독기'

 사람들에게 퇴사를 하겠다고 알리자 모두가 매뉴얼처럼 똑같이 내게 말했다.

"퇴사하면 나가서 뭐 먹고살려고 그래?"

"지금 니 나이에 퇴사하면 너무 어정쩡해 "

"힘든 시간들이 지나면 좋은 시간도 언젠가는 올 거야"


"... 사지멀쩡한 서른한 살 사내인데 어디서 무얼 한들 입에 풀칠하고 살겠어요?"

나는 렇게 난데없는 호기를 부렸다.

내 생각에 퇴사를 하기에 좋은 나이 따위는 없다.. 

그리고 지나가는 건 힘든 시간만이 아니라 나의 젊음도 머물지 않고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들이 더 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던져보기로 결정했다.

회사밖으로 나갔을 때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그걸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사실 마땅한 대안은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결정한 것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은행 퇴사 그리고 대한민국 탈출...'

걱정을 한다고 불안한 마음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애정과 무심코 내뱉는 한 마디가 내 감정의 격랑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나만의 범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주변에서 걱정 반 궁금함 반으로 물어보는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다음 목적지를 정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인생의 또 다른 파랑새를 찾기 시작했다.

과거 두 번의 장래희망을 결정했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 기준은 좀 더 명확했다.

세상의 기준으로 살지 않고, 버티며 살지 않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며 살 수 있는 것이 다음 목적지의 기준이었다

'근데 러려 뭘 해야 하지?'

삼십 평생을 내가 스스로 가둬놓았던  to do list 대로 살아왔었다. 그래서 스케쥴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에게 큰 불안감을 가져왔다. 나미 같은 불안감이 나를 덮쳐왔지만 이번만큼은 to do list 바깥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주변 모든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가장 두려워했던 실패가 현실로 다가오자 오히려 마음은 더 자유로워졌다. OMR카드를 찢어 버리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종이를 꺼내어 내 마음대로 정답을 적을 수 있는 시험장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내 인생의 정답을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으로 바꿔서 찾아보자" 

이번에는 더 연봉을 많이 주는 대기업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더 능력을 인정받으며 내 나래를 펼치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그냥 일상 속에서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직업과 환경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기준이 명확해서일까? 생각의 나침반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방향을 안내해주었다.

 

내 마음속 나침반 시침은 나의 결혼생활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지점으로 올라오면서 결혼을 했던 나는 당시에 신혼이었다. 맞벌이 었던 우리 부부는 대부분 외식을 했지만 아내는 가끔씩 내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객관적으로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따금씩 라면만 끓여줘도 나의 요리솜씨를 치켜세워주곤 했다. 본인이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나를 주방 앞에 세우고 앞치마를 두르게 하려는 큰 그림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됐건 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리고 그런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차라리 요리를 한 번 제대로 배워볼까?'

언제나 그래왔듯이 나는 생각의 방향이 정해지고나서부터는 '하면 안 되는 이유보다 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어차피 평생을 외식며 살 수는 없잖아. 음식은 안 먹고살 수도 없는 거니까 나라도 요리를 잘하면 행복한 가정의 저녁식탁 모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공교롭게도 당시에 남자셰프들이 TV에 나와서  근사하게 요리를 하는 모습이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 또한 그런 모습들에 매료된 부분이 있었고 내가 결정을 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셰프가 되기로 결심했다...'


누군가는 금 나의 살아온 이야기 보면서 어이없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며 장난 같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형사물 만화책을 보고 10년 넘게 경찰이란 직업을 동경하다가  아빠 친구가 돈 잘 버는 지점장이란 소리에 은행원이 되고 싶어 했고, 그 목표를 이룬 지 4년 만에  평생 라면이랑 떡볶이만 만들어 본 주제에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요리사가 되겠다고 하니  내가 생각해도 나는 꽤 재밌는 유형의 인간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게 나라는 사람이었..

하루 일분일초를 쪼개 쓰면서 원하는 를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가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나의 자아에 대해 탐색이 되지 않은 채 어른이 된 피터팬이기도 했다.

그때까지의 나의 삶은.. 어떻게 하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만 생각하며, 끊임없이 희망의 씨앗만 뿌려대며 살아왔인생이었기 때문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1억 연봉 대기업 타이틀이 아깝지 않아?" 

"네, 정말 하나도 아쉽지가 않습니다" 

객기 부리며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에는 이 생활을 조금만 더 지속하면 내가 곧 죽겠구나라상황까지 갔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 나는 살았다!'라는  안도의 해방감이 훨씬 더 컸다.

당시의 나의  마음은 아마 그 극한의 상황과 스트레스까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기업의 타이틀을 내려놓는 것에서 유일하게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양가부모님이었다.  양가 부모님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들께 죄송하다고 나의 남은 인생을 지금 이대로 통째로 헌납할 수는 없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양가 부모님은 나의 이런 무모해 보일 수 있는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어찌 보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30년 간 모범생처럼 살아온 자식의 인생 첫 경로이탈을 누구보다 더  걱정하셨을 텐데, 나의 이런 도전을 믿고 응원해 주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지금도 감사하다. 


무엇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저분해진 스케치북을 찢어버리고 새로운 종이에 푸른 초원과 그림 같은 집이 있는 낙원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있을 무렵  새로운 랑새를 찾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내 앞에  업무를 하러 온 고객과 우연히 대화를 누면서 다음 목적지를 정하게 된 것이다.

" 우리나라 분이 아니시네요? 해외 사는 가족분들에게 송금하시는 거예요?"

"네. 저는 뉴질랜드에서 왔는데 잠깐 여기서 지내는 거고 가족들은 그곳에서 지내요"

"뉴질랜드?? 그게 정확히 어디 있는 나라예요??"

"호주 아시죠? 거기 옆에 있어요.  반지의 제왕 영화 촬영했던 곳이에요"

TV속 세계 채널에서나 봤던 내 이미지 속의 뉴질랜드는 광활한 대자연속에 동물들이 초원에 누워있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내가 지금 현재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상상 속의 원더랜드가 딱 그곳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객은 이민을 가게 된 준비과정부터 뉴질랜드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행복한 시간들에 대해 나에게 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그 고객과의 상담 후 내 머릿속에는 온통 푸른 초원과 바다가 펼쳐진 뉴질랜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알아볼수록 그곳의 자연환경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래 여기라면 내가 행복을 찾아 떠날 값어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겠다!"

'행복하거나... 행복에서 멀어지거나...'

지금의 선택이 둘 중 하나를 결정할 거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퇴근 후 강남에 있는 유학원을 돌아다녔고, 유학원을 정한 뒤 뉴질랜드 현지에 있는 요리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2천만 원이라는 학비를 송금했고, 요리전문학교 입학 인터뷰도 준비해서 통과했다. 속전속결로 바로 다음 날 전셋집을 내놓았고 현재 살고 있는 가구들을 중고로 처분했다.

그리고 회사에는 사표를 던졌다.


"저는 뉴질랜드로 가서 셰프가 될 겁니다"


그렇게 나는 4년이라는 애증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은행과 마침내 헤어졌다

마지막 짐을 싸고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확고한 청사진도 뚜렷한 삶의 목표도 없었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라는 스스로의 확신과 위로만을 품고 마지막 4호선 지하철을 탔다.

퇴사를 했던 날 저녁,  과천역 4번 출구에 아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해맑게 웃으며 이제 우리 뉴질랜드로 진짜 가는 거냐고 묻는 아내를 보면서, 앞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를 꼭 선사해 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 앞으로도 넌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살아. 내가 거기서도 독하게 이겨내 볼게. 거기 가서 더 행복하게 살자"

우리는 서로 두 손을 모아 구호를 만들었다.

"긍정!"

"독기!"

"파이팅!"


집에 들어가서  TV를 켜니 셰프들이 요리를 하는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오빠한테 냉장고 맡기면 되는 거야?"

천진 난만하게 웃는 아내의 그 말에 맥주 한잔이 당겼다. 그리고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 혼잣말로 속삭였다..

"냉장고야.. 앞으로 나 좀 잘 부탁한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파랑새를 찾아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로.. 고통도 행복도 통째로 안은채로 떠나버렸다

"그곳에 가면 나의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퇴사와 이민을 준비하며 정말 많은 고민과 준비를 했었다.

그리고 이때 한 가지 배운 점은 '조언'과 '충고'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솔직함을 가장한 충고..

본인의 궁금함을 해소하기 위한 조언..

이 모든 것들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다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되어 주면 된다.

가보지 않은 길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모든 멋진 일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알 고 있는 세상 속에서의 기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본인이 살아온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정의 내린다는 것은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이 타이밍에 생각나는 한 철학자의 말이 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또 다른 강물이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그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나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나 역시도 매번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새로운 길을 택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과 주변의 평가의 괴리감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청춘이 있다면 이 말만큼은 전달하고 싶다.


'때로는 세상의 상식과 맞지 않는 결정이 나의 삶을 나답게 되돌려 놓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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