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이 없고 상상력이 빈곤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허구한 날 전기, 자서전, 자전적 소설, 소설적 자전 따 따위 쓰는 거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없는 작가들은 결국 자기네들의 세계를 묘사할 수밖에 없지. 자기들 세계가 아무리 빈약하다 해도 달리 방법이 없잖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에서 라울이 따분한 책을 두고 한 말을 읽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고 즐겨 읽었던 많은 책들이 우리네들 세계를 묘사한 것들이었는데, 이런 신랄한 비판을 하다니! 자서전적 소설도 좋고 여행이야기를 담은 수필도 좋고, 내가 가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다른 작가들의 수려한 글솜씨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물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천재적인 상상력과 독자들의 멱살을 잡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글솜씨는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작가들이 베르베르처럼 이 세상에 없는 기발한 상상력을 소재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라는 대목에서 얼마 전에 본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떠올랐다. 독특한 소재에 매료되어 개봉하면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혼자만 알고 있는 소설이 현실이 되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는 판타지 액션 장르다. 이미 유명한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는 아주 재미있었다. 무협지와 온라인 게임을 합쳐 놓은 듯한 이야기 전개가 흥미롭고, 상상의 세계를 꽤 그럴듯하게 표현한 화려한 CG 때문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긴 하지만 액션 영화에서 불필요한 드라마가 끼어 있으면 몰입감이 떨어져 딱 질색인데, 이 영화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액션으로 몰아붙여서 아주 재밌게 보았다. 연신 박살내고 부수는 장면들이 답답한 여름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주었다. 15세 관람가답게 혈흔이 낭자하거나 듣기 거북스러운 욕설도 없었다.
그런데 영화 평을 보니 의외로 평점이 인색하고 악평들도 많다. "원작을 훼손시켰다", "감독과 배우들이 원작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등 실망하는 글들이었다. 그렇다면 원작을 안 볼 수는 없었다. 총 500편이 넘는 대장정인데 웹소설로 읽으니 웬일인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솔직히 웹소설이나 무협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액션물로 스크린에 옮겨져서 재미있게 보았을 뿐, 나는 이 심오한 웹소설의 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회귀, 빙의, 환생이 주재료가 되는 웹소설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좋아하지만 수백 편씩 읽기엔 나에게 너무 길었다. 나의 빈약한 상상력 탓인지 가볍게 오락거리로 읽으라고 나온 글인데 이상하게도 빨리 읽히지가 않는다.
웹소설을 재미있게 읽지는 않더라도 이런 다양한 장르의 글과 영화가 나오는 것은 대환영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베르베르가 말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웹소설 작가들처럼 확실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그걸 또 수백 편을 써서 몇 년간 연재하는 작가들을 보면 그 성실함과 끈기는 정말 칭찬받을 만하다.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글을 쓴다는 '전지적 독자시점'의 싱숑 작가처럼 나는 매일 그렇게 글을 쓸 자신이 없다. 취미로 글을 쓰는 나와 매일 글을 쓰는 전업작가를 언감생심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웹소설의 독자가 1,000명이라면 그중 900명은 이미 웹소설을 쓰고 있을 거라고 하는데, 황당한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주목받지 못하면 휴지조각으로 버려져 잊힐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 딱히 바라는 목표는 아닐 것이다. 로또 1등 당첨의 꿈을 꾸며 매주 로또를 사는 것처럼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또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고민하게 된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나면 독후 활동을 하는데 책에 관한 질문에 항상 등장하는 문제가 있다.
글쓴이의 의도는 무엇인가?
(1) 정보를 주기 위하여
(2) 어떠한 주제에 대한 주장 또는 설득을 하기 위하여
(3) 재미를 주기 위하여
내가 재미있는 글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나의 글이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가끔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읽기도 하지만 대체로 재미있는 글, 재치 넘치는 글을 선호한다. 요즘 즐겨 읽는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들을 보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시간을 마치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세밀하고 현실적인 묘사 덕분에 금세 몰입하게 된다.
나는 가볍고 무해하고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다. 박장대소든, 미소든, 실소든 내 글을 읽고 웃음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