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9번의 수술을 받았다. 그중 8번은 종양으로 인해 받게 된 수술이다. 나는 앓고 있는 희귀난치병으로 인해 몸에 종양이 잘 생긴다. 그렇지만 몇 차례 종양 수술을 받기까지, 또 몸에 얽혀 있던 비밀의 조각들을 알게 될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처음 종양 수술을 받았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몸속에서 어마무시한 것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고 있음을. 그렇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중학교 1학년 부끄러움 많은 여학생 몸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려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반 속옷을 착용할 때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오른쪽 가슴 크기를 맞추기 위해 왼쪽 가슴에 패드와 양말을 잔뜩 끼워 넣었다. 비율로 따지면 마치 수박과 사과처럼 차이가 확연했기에 양말을 여러 개 채워 넣어도 크기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당시 나이가 어렸기에 종양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음은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엄마랑 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었고 그 또한 팔이 부러진 후 제대로 씻을 수가 없어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워낙 육안으로도 차이가 심했기에 몇몇 사람들이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칠판에 “마푸치는 짝가래요.”라고 써진 낙서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눈이 나빠 칠판을 볼 수 없었지만 이를 먼저 발견한 친구는 나 대신 서둘러 낙서를 지워줬다. 그리고 다른 친구는 모르고 가슴을 스쳤을 때 딱딱한 내 가슴을 보고 뭐라도 넣었냐고 농담으로 말했었다. 그런데 사실 그 가슴이 진짜 가슴이었고 뭘 넣은 쪽은 왼쪽이라고 말할 뻔했다.
상태가 이렇다 보니 엄마도 내 몸의 이상상태를 느끼고 대학병원에 나를 데려갔고 병원을 가자마자 곧장 수술날짜가 잡혔다. 2~3년 동안 성장기 청소년 몸속에서 아주 쑥쑥 자란 종양은 악성과 양성의 중간 단계인 경계성 종양이었고 크기도 10cm는 족히 넘어 보였다. 8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고 나는 답답했던 양말과 패드에서 해방되었지만 수술 직후 일반 속옷을 바로 착용할 수 없었기에 붕대로 몸을 칭칭 두르고 남은 중학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신체의 비밀스러움을 감춘 채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정기검진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종양이 재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여중생 몸에 칼자국을 남게 한 그 엽상종이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바로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여러 활동과 계획으로 알찬 방학을 보내는 대학생들과는 다르게 나는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방학 때 몇몇 친한 대학 선배와 동기들이 연락을 해오고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가슴에 종양이 있어 수술을 한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 대신 농담 섞인 말로 천사 날개 떼는 수술 하러 왔다고 말했고 고맙게도 대학사람들은 내게 더이상 어떤 말도 질문도 덧붙이지 않았다.
나는 반갑지 않은 이 아이를 또 마주하게 되었고 떠나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순수히 떠나 주지 않았다. 재발로 인해 내 오른쪽 가슴은 처참하게 떨어져 나갔고 재건 수술을 해야 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내 가슴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나중에 아이를 위해서 모유 수유를 할 수 있을까? 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기가 아직 결혼도 출산도 논할 때가 아니라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진 않았지만 묻고 싶었다. 물론 모유 수유를 못한다는 결과를 얻게 되더라도 결국 수술은 해야 했겠지만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극한의 상황에서도 내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것은 두려움보다는 모성애였다. 외관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여성의 가슴이 제 역할을 한다는 것. 그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재건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어떤 방식이냐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나는 가슴에 물풍선 같은 것을 넣어 서서히 그 물풍선이 가슴 안에서 부풀 수 있도록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시기에는 가슴이 압박될 수 있는 것을 피해야 했기에 전용 맞춤 속옷도 제작하여 착용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흘렀을까. 서서히 부풀어 가슴 안에서 보형물이 자리를 잡은 걸 확인하고 나서는 일반 속옷 중 스포츠브라를 착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스포츠브라를 착용하다가 병원에서 이젠 정말 일반 속옷을 착용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혼자 속옷집에 가서 세트로 된 속옷을 몇 개 샀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자 자신만의 만족이었다. 비록 친구들과 비키니를 입고 바다에 놀러 가지는 못할지라도 예쁜 속옷을 산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과정 하나하나가 마무리되었으니까. 재건 수술은 내가 받았던 수술 중 가장 아픈 수술이었다. 부위가 부위인 만큼 기침을 할 때마다 그 반동의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고 몸을 일으킬 때도 상체를 조금만 움직일 때도 통증이 뒤따랐다. 그래도 결국 그 모든 과정도 지나갔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아무리 내 병을 낫게 해 주기 위한 감사한 의료진분들이었지만 엄마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몸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특히 상체가 다 벗겨진 상태로 젊은 남자선생님이 DSLR카메라로 오른쪽, 왼쪽, 앞쪽 등 골고루 사진을 찍어 남기는 시간은 애써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2020년 가슴에 또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했고 2024년 종양은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네 번째 재발이었다. 종양이란 놈은 나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했다. 내 몸이 마치 버섯이 된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직까지 가슴에 재발하는 종양은 악성종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0기 암이라고 불리는 경계성 종양이고 자라나는 속도도 빠르고 악성화가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나도 그런 종양과 맞설 싸울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으니까 다행이다. 그리고 무섭다는 이유로 오히려 더 덮어두었던 결과 조기에 치료할 수 있었던 것들도 방치해 큰 병을 만들었던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은 어떤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면 바로 조치를 취한다. 물론 병원을 수차례 들락거리는 나도 여전히 검사 결과를 듣는 시간은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현실을 직시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우울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가급적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 의식한다. 가뜩이나 몸도 아파서 힘든데 마음과 정신마저 병들어버리면 정말 죽을 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을 부정하고 두려워할 시간에 더욱 또렷이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 방법과 내 병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고 공부한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혹여나 예후가 좋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검색창에 병명을 입력하고 덜덜 떨리는 마음을 달래고 심호흡하며 내용의 글자 하나하나를 몇 번을 쉬어가며 보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런 마음가짐 덕분에 이번에 받은 수술은 난생처음으로 부분마취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늘 전신마취로 수술을 해왔기에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수술을 받는다는 것이 무섭긴 했지만 회복속도나 후유증을 고려했을 땐 감사한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다. 또 운 좋게 편안한 분위기를 형성해 주는 감사한 의료진을 만나 카페에 온 것처럼 함께 웃고 수다를 떨며 수술을 받았다. 그 덕에 정말 두려움이 눈 녹듯 사르르 사라졌다.
물론 마취를 했어도 날카로운 무엇인가로 살을 쭉 째는 느낌, 그리고 피가 뿜어져 흘러나오는 느낌, 청소기 같은 것으로 종양을 흡입하는 소리, 살이 타는 냄새, 수술 자국을 꿰매는 느낌 등등 여러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결국 그 과정들은 지나간다. 수술 후 샤워를 하지 못하는 것도, 힘을 쓰거나 운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침대에서 편안하게 몸을 뒤척일 수 없었던 것도, 그리고 순간의 불편함, 무서움, 슬픔도. 그러니 더 기억해 둘 필요성도 있다. 더 나락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힘들었던 순간도 지나감을.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헤쳐 나갔던 적이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