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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저만치 와 있다(詩)

by 이정호

가을은 저만치 와 있다


이정호


동쪽 하늘 붉히며 솟은 태양,

가지 끝을 스쳐가는 바람 속에

가을의 첫 숨결이 묻어난다.


파랗던 잎사귀가 땅으로 곤두박질쳐

낙엽이 되는 순간,

계절은 비로소 얼굴을 드러낸다.


한때 뜨겁게 타오르던 햇살은

긴 숨을 고른 뒤

부드러운 빛으로 다가와 벗이 되고,

저녁노을을 준비하려

서둘러 서쪽으로 달려간다.


강가의 풀잎은 바람에 몸을 흔들고,

새들은 허공을 가르며 바쁘다.


사람들의 잰걸음은 분주하고,

모두가 다가올 짙은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저마다의 언어로 시간을 불태운다.


그러나 가을은

늘 그렇듯 조용히 다가와,

마치 오래 기다리던 친구처럼

저만치 서서 손을 흔든다.


<글쓴이의 말>

가을은 언제나 성큼 다가오는 듯하면서도, 그 기척을 먼저 알아차리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한 줄기 바람, 잎사귀의 흔들림, 태양빛의 변화 속에 숨어 다가오는 가을은 삶의 무게와도 닮아 있습니다.


이 시는 어느 강가에서 바라본 풍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동쪽 하늘에 드리운 빛과 흔들리는 억새 사이로, 저는 ‘가을이 오고 있구나’ 하는 깊은 숨결을 들었습니다. 계절의 변화가 단순한 자연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도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발밑의 낙엽을 보며 작은 계절의 징후를 느끼는 순간, 그 순간이 삶을 한층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이 시를 읽는 분들 또한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다가오는 가을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다만 한 줌의 바람일지라도, 오래 기다린 친구처럼 따뜻이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랍니다.


20250923-02.jpg (Photo by J.H.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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